사랑하는 아들에게
네 동생은 방학했어. 방학하자마자 아침에 러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더라. 그래서 적당한 시간과 코스를 알려줬지. 설마 싶었는데 그저께와 어저께 친구랑 새벽 5시에 나가서 하고 왔더라. 물론 오자마자 씻고 다시 누웠지만, 대단해.
전향점을 지난 수능 태풍은 빠르게 전진하고 있니? 달리기처럼 무엇을 하든 재밌게 몰입한다면 반드시 열매를 맺겠지.
엄마는 지난 주말에 경기도 이천시에 있는 ‘라드라비’(L’art de la vie)에 다녀왔어. 이곳은 대한민국 1세대 남성 헤어 디자이너인 이상일 님이 은퇴 후 만든 복합문화공간이야. 패션 디자이너가 되려고 시골에서 상경한 그는 외국 잡지에서 ‘남자 미용사’를 접하고 무일푼으로 프랑스 유학을 갔대. 프랑스 국립미용학교를 수료하고 돌아온 그는 30년간 톱스타와 유명인을 사로잡으며 한국 미용업계의 지축을 흔들다가 2012년에 은퇴했지.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고스란히 담은 이 공간을 만들었어. 무려 10년이 걸렸지.
좁은 시골길을 지나 라드라비에 도착했을 때 그 규모와 예술성에 깜짝 놀랐어. 특히 약 1,000평의 언덕을 둘러싼 리조트의 중심에 우뚝 솟은 바위에 압도됐지. 건물을 짓기에는 애물단지인 거대한 바위가 오히려 최고의 예술품으로 느껴졌어. 바위의 선과 면을 따라 그림 그리듯 내려앉은 22채의 집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 이곳의 진짜 주인은 자연이라고.
미술관 입구의 높고 무거운 철문을 여니 키가 큰 남성이 지팡이를 짚으며 나타났어. 베이지색 셔츠에 통 넓은 청바지를 입은 그는 백발의 노인이었지만 세련된 백작 같았지. 왼쪽 어깨에 실크 스카프로 만든 우아한 리본 주름 때문이었는지, 귀밑머리까지 자로 잰 듯 깔끔하게 손질한 머리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어. 천장에 닿을 듯 위풍당당하게 가방을 들고 있는 철제 조형물과 닮아서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는데, 바로 그가 이 신세계를 창조한 디자이너 이상일 님이었어. 그는 화가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작가로서 자신을 소개한 후, 작품을 직접 설명해 주셨어.
그는 주로 연필로 그림을 그렸는데, 한 번에 진하게 그리는 게 아니라 얇은 선을 수십 번 그어가며 원하는 농도를 표현했어. 그래서 한 작품을 매일 6시간씩 꼬박 1년을 그리기도 한대. 웅장한 궁전 같은 미술관에서 1시간 반 정도 작가의 열정적인 도슨트를 들었어. 그러면서 그가 매 순간 모든 것에 얼마나 몰입하며 살아왔는지 느낄 수 있었어.
그는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그림을 그린다고 했어. 젯소를 서른여섯 번 칠하고 사포질을 반복해 만질만질해진 거대한 캔버스 위에 가느다란 연필로 선을 긋고 또 그어가며 마치 수행하듯 그린다고. 그는 그림을 배운 적은 없지만, 오로지 자신의 경험을 상상의 구도를 통해 그림으로 창조한다고 했어. 수십 점의 연필화와 이야기가 담긴 설치작품을 직접 보여준 작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어.
“삶은 그 자체로 예술입니다. 일상의 순간은 영원한 아름다움입니다. 저는 매일 묻습니다. 나는 오늘도 창조했는가?”
EBS 예능 프로그램인 ‘서장훈의 이웃집 백만장자’에 출연한 그는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고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선언했어. 그리고 자신이 부자가 된 비법을 공개했지.
“진짜 부자는 돈이 아니라 마인드에서 나온다. 성공은 욕심보다 인내에서 온다. 일에 진심을 다하면 수천만 장자는 누구나 될 수 있다.”
폭우를 피해 우연히 찾아간 라드라비를 둘러보면서 대가(大家)와 대자연이 이룬 작품에 큰 감동과 위안을 받았어. 연필로 같은 선을 반복해서 그리는 것과 문제를 풀고 또 푸는 것은 행위의 종류는 달라도 모두 수행의 영역이지. 거장의 경지는 몰입과 인내가 데려다줄 거야. 정상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갈고닦은 좋은 습관은 시나브로 실력을 키워준단다. 어느덧 자란 네 머리카락처럼.
2025년 7월 23일 수요일
사랑하는 엄마가
PS. 네 동생이 오늘 아침엔 달리러 나가지 않고 그냥 누워있더라. 새벽에 달리다 보면 배우 박보검을 만날 수 있다고 했었는데, 이틀 동안 허탕 쳐서 실망했나 봐.
<답장>
좋은 글 감사합니다~
휴가가 얼마 안 남았어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