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퍼 세계일주 요트 레이스
사랑하는 아들에게
너를 기숙학원에 들여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서 너와 함께한 시간이 꿈처럼 느껴지더라.
꽃게 등딱지에 따듯한 밥을 비벼 먹던 해처럼 환한 너의 표정, 이제 윤곽이 드러난 진로와 한정된 공간에서 지내며 겪은 인간관계에 대해 나누었던 솔직한 대화가 스쳐 지나갔어. 엄마는 한 달 후, 다시 기분 좋은 꿈을 꾸길 기도 하며 운전했지.
집에 도착해서 마음이 허전해 TV를 켰어. 채널을 돌리다 보니 유퀴즈에 한국 여성 최초 무동력 요트로 세계를 일주한 이나경 씨가 나오더라. 그녀는 11개월간 약 21m의 요트로 영국 포츠머스에서 출발해 7만 4천 km를 항해해 5대양 6대주를 거쳐 다시 영국으로 무사히 돌아왔어. 330일 동안의 이 여정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생존 그 자체였지.
스무 명 남짓의 팀원이 3교대 근무로 키를 잡아 수면시간이 4시간 30분도 안 됐대. 게다가 부족한 식량과 협소한 공간, 예측 불가능한 바다의 변화까지! 극한의 고통 속에서 아찔한 순간이 많았겠지. 작년에 발리에서 렘봉안으로 들어가는 배에서 우리도 겪어봤잖아. 거대한 파도는 죽음의 공포였고, 어서 뭍에 닿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지. 그녀는 우리보다 훨씬 오래 배에서 생활했으니,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숱했겠지.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말했어.
“모든 걸 통제하려고 했던 내가, 바다 앞에서 흐름에 몸을 맡기는 법을 배웠어요.”
그녀의 말에 네가 떠올랐어. 공부를 안 했을 땐 하기만 하면 남들처럼 성적이 나올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니까 아니라고. 나보다 잘하는 애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아 이젠 미련 없다고. 이제 하던 대로 흐름에 맡기겠다고 했잖아.
재수를 시작했을 때 엄마가 기대했던 것을 네가 말해서 놀라우면서 기뻤어. 아직 수능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엄마는 이미 목표를 다 이룬 셈이었지. 겸손하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 그게 엄마의 바람이란다.
유능한 보험계리사였던 이나경 씨에게 MC 유재석은 물었어. 요트 항해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었냐고. 체력적 고통이나 열악한 환경 등을 예상했는데 그녀의 대답은 뜻밖이었어.
“인간관계가 가장 힘들었어요. 다양한 국적의 처음 만난 사람들이 한배를 탔잖아요. 극도로 예민한 상태여서 사소한 일로 다투기도 했죠. 굵직한 기업의 CEO인 할아버지가 통조림을 먹고 싶다고 제게 화를 내기도 했어요. 그래도 마침내 함께 완주했고, 지금도 연락하며 지내요.”
너도 그곳에서 공부가 아니라 사람이 힘들다고 했잖아. 피할 수 없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는 힘들지. 요트 안처럼 갇힌 공간이니 모두 예민할 테고. 그래도 그곳에서 성숙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네가 대견해. 이번 휴가 때 엄마를 더 배려하고 챙겨주는 모습에 흐뭇했어.
그녀는 가장 인상 깊은 풍경으로 월출을 꼽았어. 팀원들과 밤에 누워 깜깜한 바다를 바라보는데 멀리서 빛나는 돛대가 보이더래. 그래서 무슨 배인지 찾아봤는데 지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래. 시간이 지나 점차 돛이 떠올랐고, 수직으로 놓인 반짝이는 초승달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일제히 탄성을 질렀대. 그리고 한 선원이 이렇게 말했대.
“인간은 우주에 관한 지식은 많지. 하지만 심해에 대한 연구는 미미해. 우리가 주변은 의식하고 관심 두지만, 정작 자신의 내면은 들여다보지 않는 것처럼.”
네가 부모에게 도움이 되는 직업을 갖고 싶다는 얘기는 감동이었어. 그 이유는 남들에게 네 직장을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야. 그런 동기는 우리의 관계가 비틀리지 않고 사랑으로 맺어져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엄마가 바라는 것은 외적 기준이 아닌 네 자아가 즐거운 길을 따르는 것. 양심껏 떳떳하게 최선을 다하고, 책임감 있게 자신을 사유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성품에 맞는 경로를 기쁘게 그려 나가는 것. 엄마는 길가에 서서 네가 목마를 때 물을 주고, 손뼉 치며 응원할게. 그리고 건강하게 지켜보며 너의 자랑을 들어줄게.
엄마는 지금 속초에 있는 카페야. 해변을 산책하고 싶었는데 폭우에 경로를 틀었어. 이럴 줄 알았으면 책을 챙겼을 텐데, 몰랐지 뭐. 다행히 가방에 볼펜이 있더라. 그런데 종이가 없잖아. 직원에게 이면지라도 좋으니, 종이를 얻을 수 있냐고 부탁했더니 홍보용지를 주셨어. 이제 종이 앞뒤가 다 차여간다. 그만 쓰라는 신호야.
여긴 원래 통창으로 보이는 울산바위 뷰가 유명하대. 그런데 운무가 가득 내려 전혀 보이지 않네. 하지만 분명 바위는 저 너머 분명히 존재하지. 사선으로 주름진 울퉁불퉁한 거구가 늠름하게 어깨동무한 모습이 그려져.
지금 네 눈에 보이지 않겠지만, 엄마는 늘 네 곁에 있어. 팔자주름 파인 얼굴로 러닝으로 다져진 허벅지 근육을 드러내며 우뚝!
이제 비가 그쳤다. 나가볼게!
2025년 10월 10일 금요일
사랑하는 엄마가
PS. 집에 와서 꽃게 등딱지에 밥 비벼 먹으니 맛있더라. 너 주느라 엄마는 못 먹었잖아.
알지? 꽃게 살을 발라주면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등딱지를 양보하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고ㅎㅎ
< 답글>
항상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