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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29

초보 러너의 소회

by 철부지곰

사랑하는 아들에게


가을이다. 누가 뭐래도 이제 제법 가을다워. 가을은 사계절 중 하나를 의미하지만, 국어사전에 이런 뜻도 있어.


‘벼나 보리 따위의 농작물을 거두어들임. 또는 그런 일.’

봄에 뿌린 씨앗이 맺은 열매를 가을에 추수하는 것 자체가 가을인 셈이지. 그래서 ‘가을 하다’라는 단어는 ‘수확하다’와 동의어야. 가을은 가을 하는 계절이지.

올가을, 엄마의 가을은 마라톤이야. 지금까지 세 번의 10km 경주에 참여했고, 11월 초에 한 경기를 남겨두고 있어. 각 경기 모두 저마다 다른 가르침을 주었지.


첫 경기였던 ‘마블런’. 뭐든 처음은 특별하잖아. 전날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아빠는 네 방에서 주무시라고 하고 안방을 독차지했지. 숙면을 위해서. 엄마 말고 아빠의 숙면. 다음 날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했거든. 첫 대회니까 목표는 완주였어. 하지만 여름에도 주 2~3회 8km 정도 꾸준히 연습해서 은근히 기록도 기대했었는데, 결과는 아쉬웠지. 인파를 피해 지그재그로 달리다가 500m는 더 달렸지, 뭐야. 결승선에 들어오면서 어찌나 아깝던지.


두 번째는 가장 기대했던 ‘뉴발란스 Run Your Way’. 아침 일찍부터 매장에 나가 줄을 서서 어렵게 따낸 참가권이었어. 높은 인기만큼 높은 만족도를 보이는 대회로 소문이 자자했지. 그토록 기다렸는데, 밤새 내리던 비가 대회 날에도 그치지 않았어. 어찌나 세차게 내리던지, 눈을 뜨기 힘들고 맞으면 아플 정도의 채찍비였지. 대회장에 도착해 혼자 우산을 쓰고 한 시간 넘게 기다리니 달리기도 전에 추위에 지쳐갔어. 티셔츠를 반팔과 싱글렛 중 선택할 수 있었는데, 야심 차게 싱글렛을 선택해서 겨드랑이 사이로 비바람이 몰아쳤지.


휴대폰은 비에 젖어 먹통이라 내 속도와 거리를 모른 채 마냥 달렸어. 물 찬 도로를 계곡물 건너듯 질주하니 신발에 물이 찰박하게 고였어. 물론 속옷까지 흠뻑 젖었지. 습기를 머금을 수 있는 신체의 모든 털과 의류가 젖으니, 몸이 더욱 무거웠어. 드디어 1~2km 남았을 때 고비가 찾아왔지. 그때 정신을 가다듬고, 내딛는 발이 아닌 하체로 힘을 뻗어내는 허벅지에 집중했어. 허벅지 근육에 신경 쓰니 발은 저절로 움직였지. 그리고 새로운 힘이 솟는 기분이 들었어. 그렇게 광기의 질주를 마치니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더라. 수천 명의 몸에서 뭉글뭉글 피어나는 아지랑이를 보니 연대감이 느껴졌어. 그리고 기록은 58분 50초! 처음으로 1시간 미만이라는 위업을 달성했지.

세 번째는 유방암 환자를 위한 기부 행사인 ‘핑크런’. 5km 또는 10km 중 선택하는 대회여서 가족 단위가 많았어. 함께 참여한 러너 중에는 유방암 환우도 있었지. 같이 달리다가 5km는 먼저 반환하고 10km는 더 멀리서 유턴하는 코스였어. 먼저 돌아가는 5km 선수들이 어찌나 부럽던지. 게다가 뒤로 갈수록 오르막이 심해져 숨이 차고 무릎도 아팠거든. 그런데 유아차를 밀면서 달리는 부모님이 보였어. 혼자 달리는 것도 힘든데 아이 둘을 태우고 뛰다니! 중얼거리던 불평이 쏙 들어갔지. 행사에 참여하는 것에 의의를 둔 대회여서 막판에는 선수 대부분이 걷고 있었어. 엄마가 5천 명 중에서 470등이니 말 다 했지. 다들 걷고 있으니 나도 걷고 싶었어. 하지만 유혹을 뿌리치고 멈추지만 말자, 하며 완주했지.


이제 너도 마지막 1km를 남겨둔 시점이네! 이맘때 마라톤에서는 두 부류로 나뉘어. 포기하고 걸어가는 사람과 가장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선수. 엄마는 후자였어. 수천 번 쓸려 물집이 잡혀 발가락이 아팠지만, 하체의 중심인 허벅지에 집중했지. 이제 매일 과목마다 문제 풀이를 하고 있을 거야. 그럴 때 점수로 보이는 결과보다 자신의 실력과 전체적인 균형에 집중하길 바란다.


결승선에 들어서면 신기하게도 금방 호흡이 안정되면서 회복돼. 그래서 반짝이는 메달을 가슴에 걸고 웃으면서 간식을 먹지. 그리고 문자로 전송되는 나의 기록을 확인해. 개인 최고 기록을 달성하면 어찌나 뿌듯하던지. 아까 꾸물거리지 말고 좀 더 달릴걸, 하고 후회도 해. 하지만 메달은 완주한 모두에게 주어져. 지금까지 달려온 넌 메달 받을 자격이 있어!


2025년 10월 19일 일요일

사랑하는 엄마가


PS. 이번 가을이 네게도 특별하겠지. 마음껏 가을 하는 가을이 되길!


< 답글>


지금까지 열심히 가꾼 점수들 좀 더 가꿔서 수능날에 보람차게 가을해야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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