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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30

결혼을 기념하며

by 철부지곰

사랑하는 아들에게


지난주 목요일은 엄빠의 결혼기념일이었어. 네가 없는 결혼기념일은 처음이네. 허전했지만 네 동생이 본인이 좋아하는 케이크를 사서 두 배로 먹으며 네 몫까지 축하해 줬으니 걱정 마. 주말에는 북한산으로 나들이하러 갔지. 아직 단풍이 들지는 않았더라. 21년 전 이맘때엔 단풍이 고왔었지. 특히 예식 장소였던 강원도엔 절정이었어.


넌 결혼식에 못 왔었으니까, 그날의 이야기를 해줄게. 식은 토요일 오후 3시, 장소는 원주 할머니의 교회였지. 엄마는 새벽부터 드레스를 입고 올림머리를 한 채로 몇 시간씩 차를 타고 원주로 갔지. 그땐 토요일에도 등교했었어. 그래서 수업을 마친 후 12시쯤 엄마 손님들은 전세버스를 타셨지. 평소에는 2시간 반이면 넉넉히 도착했겠지만, 그해 단풍이 눈치 없이 아름다웠던 게 문제였어. 신랑 측 하객은 모두 식장에 앉아 있었지만, 신부 측 하객은 꽉 막힌 고속도로에 갇혀있었지. 엄마는 9시간째 꽉 조이고 무거운 드레스를 입고 쫄쫄 굶었지만, 배고픈 줄도 모르겠더라.


결국 예식을 30분 미뤘어. 일반 예식장이었으면 어림없었겠지만, 우리만을 위한 교회였기에 가능했지. 드디어 신부 측 혼주와 하객이 자리를 잡고, 결혼식이 시작됐지. 무사히 본식을 마치고, 다음은 폐백 순서였어. 폐백은 전통 혼례의 풍습인 만큼 한복을 입어야 했지. 그런데 엄마 한복을 수원 할머니께서 깜빡하고 두고 오셨어. 이날을 위해 특별히 장만한 것이어서 할머니께서 무척 당황스러워하셨어. 엄마는 괜찮다고 위로했지만, 자책하며 속상해하셨지. 결국 새색시 한복 대신 할머니가 입고 있던 한복을 빌려 입었지. 아마 아무도 몰랐을 거야.


어떤 커플이든 저마다 사연이 있겠지만, 이렇게 되짚어 보니 우리도 참 요란하게 시작했네. 결혼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이자 가정의 시작이지. 그래서 네가 어릴 때부터 함께 모여 기념하려고 했어. 네가 피아노로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연주해 주기도 하고, 시를 적어준 적도 있었지.


결혼


사람들은 결혼을

좋은 것이고 기쁜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항상 울음바다가 된다.

결혼자도 울고

결혼자의 엄마, 아빠도 운다.


정말 결혼은 기쁜 것일까?

난 이해가 되지 않는다.


9살의 소년이 이런 시를 썼다니, 정말 놀랐었어. 엄마는 39살에 깨달은 것을 넌 어떻게 9살에 깨친 것인지.


너의 통찰력대로 결혼은 좋기만 하지도, 기쁜 일만 있는 것도 아니지. 하지만 결혼을 후회한 적은 없어. 결혼해서 너라는 열매를 얻었으니, 엄마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야. 물론 힘들고 슬플 때도 있었지만, 너라는 기쁨이 모두를 덮고도 남았지. 네가 성인으로 잘 커서 기특하고, 이렇게 잘 키운 엄마 자신은 더 기특해. 이제 보름 남짓이면 만나겠구나. 해방의 수능을 설레며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게. 건강하렴.


2025년 10월 27일 월요일

사랑하는 엄마가

PS. 작년에 결혼 20주년을 기념해 해외여행을 가고 싶었는데, 네가 고3이어서 이듬해로 미뤘지. 그땐 재수할 줄 몰랐으니까. 그런데 올해도 또 지나가네. 부디, 제발, 기어이, 기필코 내년에는 꼭 가고 싶다!


< 답글 >


시 첫 소절 보고 엄마가 쓴 시겠거니 1초 정도 생각하다 다시 생각해 보니 어딘가 익숙하더라 ㅋㅋㅋ.


시 내용이 왤케 다크 한 지 생각해 봤는데 아마 그때쯤 아빠가 결혼기념일을 까먹어서 엄마가 단단히 화났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


어렸던 마음에 결혼기념일에 오히려 분위기가 나빠지는 게 속상해서 '싸우고 울 거면 왜 결혼한 거야! 시 읽고 얼른 화해해'라는 의도를 담았던 기억도 희미하지만 남아있는 게 신기하다.


내가 어렸을 때 썼던 시 더 있으면 다 보내줘. 옛날 기억들이 시 속에 담겨있어서 좋네.


내년엔 바람대로 꼭 가게 되겠지 아마?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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