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필름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지 돌아보니 2010년으로 거슬러 간다. 그때는 호기롭게 부산 여행에 필름카메라를 들고 갔다가 필름 넣는 법을 몰라 근처 사진관을 찾기도 했고 정성껏 찍은 한 롤 중 잘 나온 사진은 몇 장이 채 되지 않아 실망하기도 했다. 어떤 때는 노출이 맞지 않아서, 어떤 때는 흔들려서, 어떤 때는 손가락이 나와서, 어떤 때는 필름이 들어 있는 줄 모르고 실수로 커버를 열어서 사진을 망쳤다. 그런데도 계속 필름카메라를 들었던 건 필름 사진만이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었다.
원하는 만큼 양껏 찍을 수 있고 찍고 나서 바로 확인할 수 있는 디지털카메라와 달리 필름카메라는 필름 한 롤에 36장만 찍을 수 있어서 한 컷 한 컷 아껴 찍게 된다. 다 찍고 나면 현상소에 보내야 하고 현상 후 스캔본이 업로드되기까지 또 한 번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필름 한 롤에 2,500원이던 때부터 10배가 된 지금까지 필름 사진을 찍는 이유는 결과물을 바로 볼 수 없다는 단점이 곧 장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았던 순간도 시간이 지나면 금세 휘발되고 마는데 필름 사진은 언제고 소중했던 날의 기억으로 데려가 준다.
인천과 서울에서 자취하며 학교에 다닐 때도 직장에 다닐 때도 가방 속에는 작은 토이카메라가 있었다. 반차 혹은 연차를 낸 날엔 묵직한 필름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동네와 서촌, 홍대와 대학로를 걸었다. 길을 걷다가 찍고 싶은 어떤 장면을 만나면 가만히 멈춰 서서 셔터를 눌렀다. 시간을 두고 마주하는 장면 속에는 웃고 있는 나와 주변 사람들, 길을 걷다 우연히 만난 풍경들이 있었다. 마음이 힘든 날엔 별일 없는 듯 웃고 있는 내 모습에 위로받기도 했다.
지난해 공간을 준비하면서 일러스트레이터라는 현재의 일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영역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공간을 여는 첫 전시로 베를린에서 담은 필름사진으로 <It’s okay to be slowly. Berlin>이라는 전시를 열었다. 삶의 속도가 달라도 괜찮다는, 실패 앞에 의연해 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전시였다.
전시를 열고 필름사진을 기반으로 한 제품들을 만들고 소개하면서 마음 한 편에는 필름로그의 필름자판기를 설치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공간을 준비하면서 신청서를 접수했다가 반려되어 아쉬움이 많았는데 이미 필름자판기를 설치하고 운영하고 계신 순천 책방심다의 주은 님이 드롭포인트로 시작해 보는 방법도 있다고 조언해 주셨다. 주은 님이 주신 용기 덕분에 다시 한번 필름로그에 문을 두드렸고 지난 2월 대전의 필름로그 드롭포인트가 되었다. 필름 및 카메라 구매와 배송비 없이 필름로그 현상스캔 접수와 수령이 가능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지난해 10월에는 주은 님의 전시를 올 3월에는 심다 크루인 향 님의 전시를 진행하면서 두 분의 사진에 약간의 디자인을 더 해 필름로그 업사이클 카메라를 만들었다. 어린이들과 제주에 갈 때마다 책방무사 앞에 설치된 필름자판기에서 업사이클 카메라를 구입하곤 했는데 책방심다와 오케이 슬로울리에서만 판매하는 에디션 카메라를 만들게 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내게 너무 특별한 일인데 이번에 오케이 슬로울리 에디션 업사이클 카메라를 만들게 됐다.
4월에는 여섯 명의 참가자가 심다 에디션인 우연한 시간 업사이클 카메라로 3월 한 달 동안 촬영한 사진을 전시하는 <6개의 시선>이라는 사진전을 연다. 몇몇 분들은 인스타그램 스토리로 사진을 미리 공유해 주셨는데, 한 분 한 분의 시선이 너무 좋아서 전시 사진 셀렉을 위한 토요일 모임이 기다려진다.
얼마 전 읽은 책에서 내 일과 아무 관련 없는 무용한 일, 무용한 딴짓이 필요하다는 문장을 읽었다. 나이도 성별도 하는 일도 다르지만, 사진이라는 공통된 관심사로 만나게 된 분들을 떠올리면 딱 맞춤한 문장 같다. 사진으로 우리는 얼마나 더 멀리 갈 수 있을까. 작은 설렘이 인다.
(2024. 3)
“오래전 베를린에서 필름으로 담은 시선 끝에는 저마다의 속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지하철 플랫폼과 버스정류장에서, 자신만의 취향을 담아 만는 공간에서, 오래된 물건들 사이에서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순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평온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It’s okay to be slowly.’ 천천히 해도 괜찮다는 말은 전시를 보는 이들에게, 그리고 저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합니다. 기다렸던 버스가 제때 오지 않더라도, 계획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실패 앞에 의연해지길 바라며 문을 엽니다. - 2023. 6”
*심다 에디션은 현재는 순천 책방심다에서만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