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아카이빙 플랫폼 ‘필름로그’와 함께 흑백필름 출사와 카페놀 현상 워크숍을 진행했다. 카페놀 현상은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커피를 주재료로 혼합해 현상액을 만들어 현상하는 친환경 현상기법인데 필름로그에서 진행하고 있는 여러 필름 워크숍 중 가장 궁금하고 경험해 보고 싶은 워크숍이었다.
11월 전시로 ‘함께하는 사진전’을 생각했다. ‘함께하는 사진전’은 ‘온라인 글쓰기’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공간에서 꾸준히 진행하고 있는 전시 프로그램 중 하나다. 이전에 진행한 두 번의 ‘함께하는 사진전’은 필름로그 업사이클 카메라로 6명의 참가자가 한 달간 촬영한 사진을 전시하는 <6개의 시선>과 하나의 전시 주제를 정하고 주제에 맞는 필름 사진을 공모해 진행한 <여름의 장면들>이었다.
이번에는 어떤 형식이 좋을지 고민하다가 각자 사용하고 있는 필름카메라에 같은 필름을 넣어 촬영 후 전시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카페놀 현상으로 내가 찍은 필름을 직접 현상해 전시하면 더욱 의미 있는 프로그램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9월 초 필름로그에 11월 전시 기획 내용과 워크숍 희망 일정, 예상 인원 등을 기재해 워크숍 문의 메일을 보냈다. 희망 일정은 10월 중 진행이었는데 마침 대전에 다른 워크숍으로 출장 계획이 있어 출장 일정에 맞춰 9월 26일 목요일에 진행하게 되었다. 모집 기간이 짧아 걱정이 많았는데 사전 신청을 포함해 순식간에 마감되었다.
워크숍 진행이 확정된 때부터 가장 고민했던 건 자연건조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는 것이었다. 필름로그 본점에서는 필름건조기를 사용하고 있어 빠른 건조가 가능하지만, 현상소가 아닌 곳에서는 하루 이상 자연 건조가 필요해 최대한 먼지가 덜 묻는 방법을 고민해야 했다. 필름로그에서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고가의 필름건조기부터 행거 커버와 방풍 커버 등 여러 옵션을 두고 고민을 거듭했다. 이제는 현상 서비스를 하지 않는 오래된 사진관을 찾아 필름건조기가 남아 있는지 묻기도 했다. 그렇게 몇 주 동안 고민하다가 기존 인테리어를 활용해 건조할 방법이 뒤늦게 생각났다.
몇 달 전 의류 브랜드 전시를 진행하면서 피팅이 가능하도록 천장에서부터 바닥으로 떨어지는 커튼을 설치했는데 커튼 바로 옆에 있는 원기둥을 가리기 위해 피스로 고정한 아연판이 눈에 들어왔다. 아연판에 고강력 자석 고리를 붙이고 거기에 필름 클립을 걸면 필름과 판 사이에 공간이 생겨 필름이 벽에 바투 붙지 않으면서 원하는 높이만큼 높은 위치에서 필름을 거는 게 가능했다. 생각이 정리되고 나니 준비해야 할 것이 분명해져 자석고리와 필름클립을 주문하고 여기에 혹시 필요할지 몰라 암실 장비인 필름피커와 필름스퀴즈도 함께 주문했다. 현상액을 저을 때 필요한 스텐 스트로우는 필름로그에서 조언해 주신 30cm로 준비했다.
그리고 오늘 네 명의 참가자와 두 명의 필름로그 현상팀이 공간에 모였다. 마감 후에도 여러 문의가 있었지만 4명이라는 소규모로 진행하게 된 데는 나를 포함해 5명의 현상 작업에 필요한 장비만 해도 현상탱크 5개, 암백 5개, 500ml부터 5L까지 크기와 종류가 다른 비커 27개 등 필요한 장비 수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기구를 테이블에 놓기 위해 기존 스텐 테이블 외 캠핑 테이블과 체어를 추가로 세팅한 후 출사와 워크숍을 진행했다.
카페놀 현상은 커피와 비타민C, 워싱소다를 혼합해 현상액을 만드는데 현상액을 배합하니 고소한 커피향기가 솔솔 풍겼다. 일반 현상액을 사용했다면 시큼한 냄새가 공간을 채웠을 텐데 커피를 사용하니 특별히 환기하지 않아도 될 만큼 향기가 은은했다.
현상 과정은 필름피커를 사용해 필름 매거진에서 필름을 살짝 꺼내는 것부터 차근히 진행되었다. 촬영한 필름에 빛이 들어가지 않게 암백 안에서 필름을 릴에 감고 현상탱크에 끼워야 해 연습용 필름으로 여러 번 연습한 후 필름과 릴, 현상탱크, 가위를 모두 넣은 후 지퍼를 잠그고 암백 안에 손을 넣었다. 손끝의 감각만으로 필름을 릴에 감으려니 나도 모르게 계속 손에 땀이 쥐어졌다. 실수하면 촬영한 필름을 모두 망칠 수 있기 때문에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필름 현상을 위해서는 현상, 정지, 정착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현상탱크에 현상액을 붓고 나서 타이머를 맞추고 정해진 시간 동안 현상탱크를 위아래로 뒤집어 주며 섞어주는 연속 교반과, 25초 대기 후 5초 교반을 반복하는 과정이 꼭 수행처럼 느껴졌다. 카페놀 현상은 교반한 필름을 15분 동안 흐르는 물에 수세 후 필름클립에 고정해 거는 것으로 모든 과정이 마무리되었다.
아연판에 필름클립과 필름이 걸려 있는 모습이 하나의 정물처럼 느껴졌다. 내가 촬영한 필름을 직접 만든 현상액으로 현상하고 나니 뿌듯함과 성취감이 밤송이 떨어지듯 우수수 떨어져 내 안에 굴러왔다. 눈으로 보았을 땐 먼지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스캔과정에서는 도드라질 수 있어 필름로그에서 재수세 후 스캔해 주시기로 해 가장 고민했던 먼지와 물때 걱정도 덜었다.
함께한 시간과 새로운 경험이 너무 소중해 오늘 촬영한 사진과 영상을 보고 또 보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처음 경험하는 일 앞에서 모두가 작아졌다가 커졌던 순간들이 스쳐간다.
(2024. 9)
* 언제나처럼 워크숍 진행 당일에도 꿈을 꿨다. 중요한 행사를 앞둔 날엔 꼭 가장 최악의 상황이 꿈에서 펼쳐지는데 오늘 꾼 꿈은 모든 워크숍이 끝난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휴식을 취하다가 불현듯 출사만 하고 카페놀 현상은 하지 않고 끝났다는 걸 깨닫는 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