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완주

by 다다

지난여름 출판계에서 가장 화제가 된 소설은 단연 김금희 작가님의 『첫 여름, 완주』일 것이다. 박정민 배우가 운영하는 무제 출판사의 [듣는 소설] 시리즈 첫 권, 『첫 여름, 완주』는 기획과 집필 단계부터 시각 장애인을 염두에 두고 쓰였다. 일반적인 출판 프로세스와 달리 시각 장애인 독자가 가장 먼저 소설을 만날 수 있도록 오디오북을 먼저 출간한 후 종이책을 출간했고 이후 뮤직비디오와 전시 등 다양한 방식으로 독자들을 만나며 큰 관심을 받았다.

나 역시 『첫 여름, 완주』 출간 소식을 들은 후부터 책이 출간되기를 기다렸고 오디오북을 들으면서는 때때로 눈을 감고 들으며 시각 장애인의 마음을 상상해 보고, 종이책으로 읽으면서는 인물과 배경이 입체적으로 살아나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은 날은 창밖에 여름비가 내리고 있었다. 『첫 여름, 완주』는 그날처럼 여름비가 내리면, 여름 장마가 시작되면, 마침내 비가 그치고 연둣빛 잎들이 더욱 선명하게 반짝이기 시작하면 그때마다 떠오를 책이었다. 그렇게 열매를, 완주 마을의 사람들을, 열매를 염려하던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여름마다 떠올리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책을 읽고 나서 여름이 끝나갈 때 공간에서 작가와 독자가 만나는 모습을, 여름을 완주해 낸 서로를 보듬어 주는 장면을 상상했다. 여름의 한낮이 아닌, 여름의 끝자락에.


김금희 작가님은 2022년 『크리스마스 타일』을 출간할 때 내게 스탬프 제작을 의뢰하면서 처음 관계를 맺었다. 그때는 창작자 플랫폼을 통해 스탬프를 주문해 주셨는데, 제작 상담을 위해 대화를 나눌 때 타일 일곱 조각이 그려진 눈사람 이미지를 말씀하셔서 그저 타일 가게를 운영하는 동명이인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스탬프를 발송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서점의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크리스마스 타일』 동네서점 에디션을 소개하는 피드를 발견했다. 내가 제작해 드린 스탬프가 면지에 찍혀 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아닌, 내가 알고 있는 그 김금희 작가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시간이 흘러 지난해 『대온실 수리 보고서』 출간을 앞두고 작가님이 내게 다시 한번 연락해 오셨다. 책의 면지에 담길 친필 사인본을 작업하기 위해 책 속에 주요하게 등장하는 흰죽지수리 ‘마마무’로 스탬프 디자인을 의뢰하신 것이다. 밭은 일정이었는데 다행히 원하시는 일정에 맞춰 보내 드릴 수 있었고, 작가님은 책이 출간된 후 내게 조그만 선물과 함께 책을 보내 주셨다. 회복과 재건을 담은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읽고 나서 감동과 여운이 깊었는데도 북토크 문의는 드리지 못했다. 어렴풋이 연결되어 있어 거절하기 곤란한 상황을 만들어 드릴까 봐 주저했던 것인데 『첫 여름, 완주』를 읽고 나서 메일을 보내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기 내 출판사에 북토크 문의 메일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거절하게 될 상황을 고려해 북토크 진행이 어렵더라도 지금 필요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게 [듣는 소설]을 기획하고 작가님에게 집필을 제안해 주신 박정민 대표님과, 시각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작품의 방향을 구상하고 회복의 과정으로 가는 이야기를 집필해 주신 김금희 작가님께 독자로 감사드린다는 인사를 전했다. 북토크 문의를 드리면서 당시 서울에서 진행 중인 〈완주 : 기록 : 01〉 전시 작품의 일부를 9월에 전시할 수 있을지 함께 문의드렸는데 이틀 뒤 답장이 도착했다. 북토크도 전시도 가능하다는 연락이었다.

박정민 대표님은 메일에서 LCDC SEOUL에서 진행 중인 〈완주 : 기록 : 01〉 전시 작품과 곧 있을 2025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소개하는 작품이 달라 원하는 작품을 이야기해 주시면, 전시 작가님들과 상의해 진행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북토크와 전시 진행이 확정된 후 공간 휴무일에 LCDC SEOUL을 찾아 〈완주 : 기록 : 01〉 전시를 보고 돌아왔다. 암전된 공간에서 오디오북을 감상하고 나서 오디오북의 여운을 안은 채 이어서 뮤직비디오를 본 후, 불을 켜고 전시 작품을 관람하는 일련의 과정이 특별했다. 좋아하는 소설이 또 다른 형태로 확장된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독자로서 무척 행복했는데 전시를 보고 돌아오니 공간에서는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지 많은 고민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캐피디자인 브랜드 전시를 진행할 때 피팅 공간 마련을 위해 코너에 설치한 암막 커튼이 떠올랐다. 『첫 여름, 완주』는 오디오북으로 먼저 선을 보인 책인 만큼 오디오북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암막 커튼으로 분리된 공간을 활용해 오디오북 청음 경험을 제공하는 방안을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을 출판사에 전달했고, 박정민 대표님은 흔쾌히 전시에서 사용했던 편집된 오디오북 음원 파일을 보내 주셨다. 청음 테이블은 공간의 시작을 함께한 카밍그라운드 목수님들께 제작을 의뢰했다.


2025 서울국제도서전을 찾아 무제 부스에 전시된 작품들을 확인하고 다른 장소에서 박정민 대표님을 우연히 마주쳐 짧은 인사를 나누었다. 도서전에 다녀온 후 전시 작품은 〈완주 : 기록 : 01〉 전시와 2025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전시된 작품을 가능한 한 모두 보여주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다만, 작품들을 택배로 전달받기에는 파손이 우려돼 공간 휴무일에 출판사에 방문해 차량에 싣고 오는 방법을 제안했는데, 박정민 대표님은 무제 출판사의 책과 작가님을 공들여 모셔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직접 전해 주겠다는 답장을 주셨다. 작품을 전달받기로 한 일정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


이런저런 메일이 오가는 동안 전시 제목을 고민하다 ‘Breathe again’이라는 제목을 떠올렸다. 열매 할아버지의 당부처럼 다시 숨을 크게 내쉬고 다음 계절로 힘차게 걸어가길 바라는 마음과, 여름을 완주해 낸 스스로를 안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 제목이다. 전시 제목을 결정하고 출판사에 요청해 받았던 사진으로 포스터를 디자인한 게 지난 6월 말의 일이다.


출판사에 메일을 보내고 진행이 확정되었던 때와 같은 시기에 충남대학교 그림 동아리에서 한 통의 메일이 왔다. 9월 독서의 달에 책갈피 형태로 4컷 형식의 웹툰 일러스트를 그려 작게나마 협업해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메일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첫 여름, 완주』가 떠오른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동아리 회장 학생을 만나 9월에 있을 전시와 북토크 소식을 전하며 유일한 가이드로 꼭 『첫 여름, 완주』를 읽고 나서 그려 달라고 당부했다. 첫 번째 만남을 가지며 책을 선물했던 게 5월 말, 동아리원들이 그린 그림을 가지고 다시 만난 게 8월 초의 일이다. 두 달 동안 책과 오디오북으로 『첫 여름, 완주』를 만난 후 그려 온 그림들은 그림을 전공하지 않은 학생들이 그린 그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각자의 개성과 표현이 아름다웠다. 그림 동아리에서 1차로 추려 온 그림들을 두 번의 만남을 통해 다시 열 개로 추렸다. 그중 5개는 책갈피로 나머지 5개는 스티커로 제작이 될 예정이고, 학생들의 노력에 보답하고 싶어 선정되지 않은 그림을 포함해 미니진 형태로 제작해 소개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북토크 문의 메일을 보낸 5월부터 8월까지 여러 번의 메일이 오가는 동안 카밍그라운드에 청음 테이블 제작을 의뢰하고, 헤드셋을 장만하고, 영화의 주요한 소재인 영화 〈마스크〉의 외화 비디오를 구하고, 간판을 만드시는 아빠께 부탁드려 책 표지 이미지로 조명을 만들어 지난 휴가 때 직접 가지고 왔다. 이미 다른 곳에서 전시한 작품들을 다시 소개하는 것을 넘어 오케이 슬로울리에서는 어떤 차이를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하다 나온 작은 디테일들이다.


지난 6월 카밍그라운드에 제작을 의뢰한 청음 테이블이 며칠 전 공간에 놓였다. 직접 배송해 주셔서 오랜만에 카밍그라운드의 수인, 유진 목수님과 8살 강아지 호수를 다시 만났다. 아직 전시 작품이 도착하기 전인데도 조색 비율과 나무 수종을 바꿔가며 고심해 만들어주신 테이블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든든해졌다. 세 시간을 걸려 대전까지 직접 와 주신 마음도 너무 감사했는데 청음 테이블에 놓일 헤드셋 걸이도 선물해 주시고, 그동안 사람들의 손길과 시간이 쌓이면서 조금씩 바래진 비워둔 테이블과 책장, 포스터랙과 북카트, 미니진 정리함을 챙겨온 관리 도구들로 보완해 주셔서 자꾸만 마음이 뭉클해졌다.

처음 공간을 준비할 때 그 시작을 카밍그라운드와 함께하고 싶었던 건 ‘좋은 가구는 좋은 삶으로 이끌어 준다’는 믿음으로 정성 들여 가구를 만드는 목수님들의 마음이 내가 꾸려가는 공간에도 스며들길 바라서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다시 카밍그라운드를 떠올리게 된 것도 같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수인, 유진 목수님과 할머니가 될 때까지 오케이 슬로울리와 카밍그라운드 모두 건강하게 잘 이끌어 가자고, 그때쯤 함께 큰일을 벌여 보자고 약속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머리가 하얗게 센 채 많은 사람들이 방문할 수 있는 쇼룸을 갖추고 가구를 만드는 목수님들과, 조금 더 넓어진 공간에서 두 분이 만들어 주신 책장에 책들을 정리하는 내 모습이 그려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하루 내게 주어진 일들을 성실히 해 나가자고, 얼마 남지 않은 전시와 북토크를 차근히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하며 결이 고운 테이블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2025. 8)


첫 여름 완주_전시 포스터.jpg

무제 x 오케이 슬로울리

〈첫 여름, 완주 : Breathe again〉

2025. 9. 2 - 10. 11 (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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