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

2019년 1월 1일

by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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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니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까지 하얘졌다.”


<설국>을 처음 읽었을 때가 고등학생이었다. 내가 자라던 영광은 눈의 고장. 소설에서처럼 가로등까지 눈이 쌓이진 않았다. 자고 일어나면 어른들 물팍까지 눈이 쌓이는 날은 흔했다. 하루에 세 번씩 오던 버스가 몇 날 며칠이고 안 왔다. 어른들은 당그레와 삽으로 눈을 헤치면서 면소재지까지 걸어 나갔다.


눈의 고장 아이들은 깔끄막으로 올라가서 요소비료 푸대로 미끄럼을 탔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빈 논에서는 썰매를 탔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저수지로 원정을 가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는 저마다 식량을 챙겼다. 나는 항상 고구마! 담배를 일찍 배워서 비사벌 성냥을 갖고 다니는 크나큰 머시매들이 저수지 한부짝에 불을 피웠다. 몸도 녹이고 구워도 먹으라고.


“하이고, 징그랍다잉. 하늘이 빵꾸라도 났을끄나?”


아짐들은 김장독에 묻은 배추김치를 꺼내러 갈 때마다 컴컴하게 내려앉은 하늘에 대고 푸념을 했다. 동네 아이들은 날마다 눈밭에서 노느라 옷을 버려서 왔다. 깡깡 언 시냇물을 방망이로 두드려 깨서 빨래를 해야 하는 아짐들은 “잡아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의 새끼들”이라고 욕을 하곤 했다.


논두렁에 개불알(풀)꽃이 피고 나서도 미친 척 눈이 내릴 때가 있었다. 양지바른 곳에 핀 할미꽃이 지고 나야 눈은 완전히 물러갔다. 햇볕은 선심 쓰듯이 따스해지지만 고집 센 바람은 한 박자 늦게 보드라워졌다.


그러고 나면 여름. 허구한 날 아이들은 냇가와 둠벙에서 놀았다. 부지깽이도 손을 보태야 하는 가을이 와야 일시적으로 철이 들었다. 어른들과 똑같이 벼를 베고, 낟가리를 쌓고, 탈곡기에 벼를 넣고 훑었다. 함박눈이 와야 아이들의 본성은 봉인해제 되었다. 날마다 날뛰며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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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1일. 함박눈이 쏟아질 줄 몰랐으니까 뒷동에 사는 큰누나네 집에 갈 때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갔다. 어쩌다 보니 우리 식구와 어머니, 큰시누이, 아주버님은 은파에 있는 식당에서 오리백숙과 닭백숙을 먹고 있었다. 눈이 포근하게 내리는 게 아주 잘 보였다.


“먼저 가세요. 우리는 은파 걷다가 갈게요.”


어머니한테 그렇게 말할 때 강동지의 생각은 이랬나 보다. 하나도 젖지 않은 채로 눈을 조금 맞다가 우아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것. 그러나 우리가 걷기 시작한 곳에서 물빛다리는 좀 멀었다. 포기할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는 함박눈을 맞으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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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길 알어? 아빠가 그냥 저쪽으로 가자고 했잖아.”


코와 볼이 만화에 나오는 애들처럼 빨개진 꽃차남이 물었다.


“엄마가 길 못 찾는 것 봤어?”

“가이드북이랑 핸드폰 앱 보고 다녀서 그렇지! 지금은 없잖아.”

“그래도 엄마는 다 알아. 헷갈리면 처음에는 왼쪽, 그 다음에는 오른쪽으로 가는 거야. 산에서는 물소리 따라서 가는 거고.”


허세는 금방 들통 났다. 물을 끼고 돌아야 할 은파에 왔는데 왜 우리는 산으로 가는 오솔길을 걷고 있나.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어쨌든 쭉 올라갔더니 내리막길이 나왔다. 다시 살얼음이 낀 은파의 산책길이 보였다. 우산을 쓰고, 패딩을 입고, 모자를 쓴 채로 산책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길 잃을 걱정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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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나무나 길 위에만 쌓이지 않았다. 잰 걸음으로 걸어가는 우리 식구의 머리와 어깨, 심지어 일직선인 등과 배(여기는 좀 둥그렇네ㅋㅋ)에도 쌓였다. 꽃차남이 눈에 완전히 파묻히지 않은 솔방울을 차기 시작했다. 축구 경기 시작! 선수 세 명이 뛰면서 제각각 중계까지 겸했다. 금방 지쳐버렸다.


“눈사람 됐네. 빨리 사진 찍으세요.”


물빛다리를 건너던 어떤 부부가 우리 식구한테 말했다. “네!”하고 웃었더니 그 자리에 서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빨리 실행에 옮기라는 재촉인 셈이었다. 강동지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새해 첫날에 내린 함박눈. 우리는 그저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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