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를 모르는 백수의 산행>

내변산 남여치 월명암

by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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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 같이 산에 가요.”


한길문고 에세이 쓰기 1기 김준정 선생님은 틈만 나면 훅 치고 들어왔다. 직장에 다니면서 살림하고 애를 키우는(내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사람이 산에 가기가 그렇게 쉽당가요. “바빠요”하면 끝이었다.

그런데 6월 1일부터 나는 백수. 김준정 선생님의 마수를 피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김준정 선생님은 날마다 근력운동을 하는 산악인. 히말라야에 끌고 갈 수도 있는 사람이 겨우 동네 뒷산에 가자고 했다.


어디 가려면 옷이 문제다. 예전에는 등산옷 몇 벌에 등산신발과 등산지팡이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산에 한 번 가려고 옷 사고 신발 사는 사치를 부릴 수가 없었다. 백수니까.ㅋㅋ


작년 여름에 내내 신고 다녔던 까만색 아디다스 런닝화에 핑크색 면티, 그리고 버릴까 말까 망설이다가 올해는 살려두었던 하얀색 잠바와 바지를 입었다. 배낭은 꽃차남이 소풍 갈 때 들고 가는 걸로 픽!


어제 아침 8시 반. 나는 산악인의 자세로 김준정 선생님을 기다렸다. 요새 글쓰기에 물이 오른 김준정 선생님은 내 심리를 간파했다. 청암산과 부안 남여치 중에서 어디를 가고 싶느냐고. 어쩐지 멀리 가고 싶었다. 그래서 부안 내변산으로.


덩달아 나도 옛날로 돌아갔다. 천년 묵은 여우가 탐낼 만큼 내 간이 말랑말랑했던 시절. 보름달 뜨는 밤에는 내변산 남여치를 간 적도 있다. 너럭바위에서 멍을 때리고 내려와서는 또랑에 랜턴 불빛을 비추었다. 가재를 잡았다가 도로 놔주었더랬지.

남여치 주차장에서 김준정 선생님은 장비 자랑을 했다. 커다란 등산 배낭에 냉장고 기능이 있는 특수 물품과 등산지팡이.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동네 뒷산 100번은 가고 나서 등산화를 살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안 산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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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봐주지 않는 오르막길. 이상하게도 내가 앞에 가고 있었다. 나이든 어른들이 오랜만에 만난 젊은 애들 앞에서 허리를 일부러 꼿꼿하게 걷는 것처럼 힘차게 올랐다. 자세가 흐트러지기 전에 월명암이 보였다.


뒤편에는 월명암. 앞에는 숲. 산들바람에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소리와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서 있었다. 진정한 산악인인 준정 선생님은 스마트폰을 꺼내서 그 순간을 기록했다.


노련한 산악인인 김준정 선생님은 나를 직소폭포까지 끌고 가지 않았다. 장엄한 능선이 보이는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배낭에서 차가운 호가든 맥주를 꺼내주었다. 내가 뭐 술 좋아하나. 젊은이가 주는 걸 마다하기 싫어서 따라주는 대로 마셨다. ㅋㅋ


더 나아가지 않았다. 우리는 길을 되돌아서 내려왔다. 주차장에 오니까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하늘은 내내 흐렸지만 나한테는 완전 쨍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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