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처음 하는 일은 격찬받는다. 누워 있던 아기가 뒤집거나 걸음마를 뗄 때처럼. 음성지원 기능이 없는 사진 한 장에서도 아기에게 감탄하는 식구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차창으로 상가의 간판 글씨를 읽었다고, 혼자서 두발자전거 타기에 성공했다고 환호받던 시절은 끝난다. 성장할수록 어제보다 오늘 더 잘해야 할 일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전업 작가가 된 지 만 3년. 책을 펴낼 때마다 문필업의 신비를 느낀다. 나는 그저 내 일을 했을 뿐인데도 특별한 사랑을 받던 호시절로 돌아간다. 출근하면 한길문고 작업실에 꽃과 케이크가 있다. 신간에 사인받으러 오는 독자 몇몇은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앨범과 굿즈까지 선물한다. 어느 날은 반듯한 글씨로 쓴 손편지가, 어느 날은 새로 펴낸 책의 표지로 만든 에코백까지 도착해 있었다. 나는 서가가 런웨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방을 어깨에 메고 ‘마들 워킹’을 했다.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는 거의 20여 년에 걸쳐 쓴 에세이다. 전남 영광의 불갑사에 부모님과 함께 간 날이 시작이었다. 그 절집에서 스물여섯 살의 엄마는 딸이 셋이니까 아들 낳게 해달라고 빌었고, 서른서너 살의 엄마는 봄 소풍 마친 딸들을 자전거 앞뒤에 태우고 가느라고 ‘새끼 똥구멍’이 벗겨졌고, 쉰네 살의 엄마는 교통사고로 죽을 뻔한 아들이 살아있는 것 자체가 효도라며 아무것도 빌지 않았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가 모르는 부모님 삶을 기록하고 싶었다.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글로 쓰고 싶었다. 엄마는 농사 많이 짓는 집의 큰딸로 태어났다. 머슴하고 똑같이 일 시키고 남자 고무신을 사주는 외할아버지 때문에 “결혼만큼은 내 맘대로 하겠다.”고 결심했다. 당연히 외할아버지는 생활력 없게 생긴 사윗감을 싫어했고, 엄마는 단식을 해서 잘 차려입은 우리 아빠랑 결혼했다. 그 뒤로 논밭에서 식당에서 공사장에서 육체노동자로 살았다.
“느그 엄마는 근면 성실 말고는 별 매력 없는 사람이어야.” 우리 엄마 조금자 여사는 아빠의 야박한 평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4남매를 기르고 공부시켰다. 기술 가진 사람을 선망했고, 마침내 영광 법성포에서 굴비 엮는 기술자가 되었다. 카톡을 배워서 딸들한테 보낸 날, 동네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처음 마신 날에도 엄마는 “살아가는 일이 이러코 기쁠 수가 없다이.”라고 했다.
1933년생인 수산리 아버지(시아버지) 강호병씨는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도 꼬추가 떨어질 일이 없다.” 며 처자식을 위해 요리하는 사람이었다. 화나거나 속상한 일이 생기면 허허허 웃거나 “짜증을 내어서 무엇하리”로 시작하는 노래를 불렀다. 1년에 열네 번씩 제사를 지내는 장손이었지만 당신 돌아가시면 제사는 지내도 그만 안 지내도 그만이라고 했다. 지금 웃으면서 잘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아버지는 ‘들어온 자식’인 나한테 바라는 게 없었다. 우리 식구가 시가에 간다고 전화하면 밥 차려놓고 기다렸다. 내가 글 쓰는 사람이 되기 전부터 이 도시에 깃든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나는 아버지가 해준 이야기 덕분에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이라는 인문지리서를 쓸 수 있었다. 처음 쓰는 동화에는 이제 세상에 안 계신 아버지를 등장시키고 잠깐 울먹였다.
먹고사는 일에 충실했던 엄마, 처자식 건사하고 이웃과 더불어 살았던 수산리 아버지 이야기가 한 권의 책이 될 거라고 생각 안 했다. 어느 날, 10년간 책을 만들어온 김화영 편집장이 숨어있는 글 같은 게 있느냐고 했다. 김화영 편집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2020 우수출판콘텐츠’와 ‘2020 문학나눔’에 선정된 <환상의 동네서점> 원고를 알아본 사람이다. 나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부모님 글 몇 편을 모아서 김화영 편집장에게 보냈다.
“선생님. 열(?) 일 놔두고 궁금한 마음에 원고를 읽기 시작했는데... 읽으면서 진짜 넘 울어서. 근데 집에서 펑펑 울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다 보니. 참을라 하는데 못 참겠고 이래서 눈 아프고 머리 띵해졌어요ㅎㅎ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나는 글이었고, 그런 책이 될 것 같아요!”
원고가 물성을 가진 책으로 만들어지는 동안 편집자와 작가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의 교정지가 오가는 동안 김화영 편집자와 나는 서로 눈물 콧물 쏟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새로 읽을 때마다 감정이 솟구치는 대목이 달랐다. 오랜 세월 한 편 한 편 즐겁게 썼는데, 곳곳에 눈물 버튼이 심어진 책이 되고 말았다.
10월 29일, 한길문고는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를 215권 입고했다. 실물에서는 슬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표지는 양장, 읽던 페이지를 접지 않게 만든 노란색 가름끈, 책 제목에는 투명홀로그램 박 효과, 햇볕에 들고 서 있으면 반짝였다. 1부는 엄마 이야기, 2부는 수산리 아버지 이야기라 책 배에 주황색과 초록색으로 나뉘어 있었다. 촤르륵 넘기는 재미도 있었다.
군산 독자들은 얼마든지 온라인 서점에 주문할 수 있는데도 한길문고에 와서 책을 산다. 8년 전에 부산에서 군산으로 이사 온 한낱님은 이웃에게 은파호수공원과 한길문고를 군산의 명소로 추천받았다고 했다. 그토록 사랑받는 동네서점에서 내 책들은 한 번도 빼놓지 않고 한길문고 베스트셀러 1위를 했다. 몇 달씩 장기집권도 했다.
이번에는 한길문고 매대에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를 3단으로 높게 쌓았다. 압도적이었다. “이래도 책 안 사실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사인본 주문이 들어와서 퇴근했다가 다시 서점에 갔더니 매대를 넓게 차지한 5단 진열! 100권에서 200권 사이로 입고해도 매대에 놓은 건 50여 권뿐이었는데, 왜? 한길문고 대표님한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책 왜 저렇게 많이 쌓아놨어요?”
“너 기분 좋으라고!”
동네서점이어도 베스트셀러 1위 하려면 그달에 100권 이상은 팔려야 한다.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는 아슬아슬했다. 월말에 입고되는 바람에 사흘밖에 시간이 없었다. 뜻밖에도 한길문고라는 안온한 세계에 사는 ‘우물 안 개구리 작가’를 응원해주려고 서울, 양주, 고양, 광교에서도 사인본 주문이 들어왔다. 덕분에 바로 베스트셀러 1위를 할 수 있었다.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에 나오는 우리 엄마는 뭐든 보여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논과 밭, 산밖에 없는 시골에 살 때도 해수욕장과 광주 사직공원에 우리 4남매를 데려가서 인파를 보여주었다. 내가 아이 낳고 기를 때에도 말했다. “내 지영이, 너무나 보여주고 싶은 소금 창고가 있당게는.” 어느 날은 친정 와서 특별한 것도 못 보고 돌아간다며 일하러 가는 당신 모습이라도 사진 찍으라고 했다. 나중에 글로 쓰라고.
동네서점에서 베스트셀러 1위 한 기념으로 SNS에 엄마 사진을 올렸다.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책을 강남 교보문고에서 구입한 김재완 작가님은 “예상보다 러블리하셔요. 연예인 본 느낌.”이라고 댓글을 달았다. 다른 사람들도 상상 속 조금자 여사보다 더 아름답다고 했다. 엄마는 미인인 적이 없었고, 나는 나이 들수록 엄마 얼굴 닮아가서 분하지만, 밤중에 그냥 전화를 걸었다. 책을 다 읽었다는 엄마는 말했다.
“내 지영이는 어쭈고 그러고 잘 썼어?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야.”
“어느 부분에서?”
“느그 수산리 어르신(내 시아버지)글 읽음시로 한정없이 울었제. 세상천지에 돌아가시는 날까지 그러고 선하고 멋있는 사람이 어디가 있겄냐이? 나도 자식들한테 짐 안 될라고 아침마다 더 열심히 산에 다니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