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로 찍어주는 영정사진이 싫어서 돈 들여 프사를 찍은 우리 아빠는 1948년생, 3년 전에는 광주 가서 혼자 쌍수를 했다. 생물학적으로는 엄마보다 한 살 많지만 70살 연하 같다.
어제 영광 엄마 집(엄마가 샀음)에 갔다. 아빠는 밥 먹자 마자 나한테 칭찬받고 싶어서 서류를 가져왔다. 봉투에 적힌 명칭을 읽은 순간 가슴에서 뜨거운 게 올라왔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우리 할아버지 배희근씨는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 스물두 살에 돌아가셨다.
우리 작은 할아버지 배배식씨는 휴가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하다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아빠는 증조부모 손에서 자랐다. 두 분은 큰아들이 남기고 간 유일한 핏줄을 3학년 때부터 광주로 유학 보냈다. 계림국민학교에 다닌 아빠는 공부를 몹시 잘했고, 5학년 때부터는 반장을 했다. 글도 매우 잘 써서 학교 게시판에 1년 내내 아빠가 쓴 작품이 붙어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빠는 계속 공부하지 못했다.
연좌제가 있던 때라 빨갱이 자식은 면서기도 못 된다는 수군거림을, 태어나서 한 번도 아버지를 보지 못하고 살아온 인생을, 아빠는 용기 내서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한테 말했다고 한다.
“아빠, 그때 말하면서 울었어?”
“울긴 울었제. 서류 통과되고 전화 조사받을 때는 참았씨야. 다 끊고 난게는 눈물이 나드라이. 너무나 어린 나이에 그렇게 됐잖애.”
울음이 터질까 봐 나는 아빠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처자식 먹여살리는 일을 등한시했지만, 60살 넘어서 철이 들기 시작한 사람. 여전히 구두와 신상 셔츠를 좋아하지만, 75세 남자 중에서 아내 심부름을 가장 잘 다니는 아빠에게 정말 잘했다고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