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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가안내자 옥돌 Feb 07. 2024

새봄에게

23.12.23

"일어버린 나를 찾고 싶나요?"


예산 청년마을의 지역살이 프로그램 ‘예산 탐구생활’ 참여자를 모집하는 문구에 홀린듯이 낯선 곳으로 향하는 열차에 올랐습니다. ‘왜 하필 예산이었냐?’라고 묻는다면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사실 이름도 몰랐던 지역이었어요. 예산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무엇이 유명한지는 물론, 5박 6일 동안 누구와 어떻게 시간을 보내게 될 지도 모르는채 무작정 떠나왔습니다. 그냥 어디로든 벗어나고 싶었고, 그렇게 연이 닿은 곳이 예산이었습니다.


8월의 어느 여름날, 처음 예산에 발 디뎠던 날을 떠올려 봅니다. 용산역에서 두 시간 남짓 기차를 타고 예산역에 도착했습니다. 생각보다 서울에서 멀지 않았어요. 그런데 뙤약볕 아래 예산역에서 케미하우스까지 걸어가는 거리가 어찌나 멀게 느껴지던지요. 한 손으로 캐리어를 달달 끌고 다른 손으로 햇빛을 가려가며 겨우 도착했고,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처음인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초면인 사람들끼리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 받고, “어디서 오셨어요?”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어요?” 같은 상투적인 대화가 오갔습니다.


도망치듯 떠나온 예산은 낙원이 아니었던 걸까요. 말로 꺼내기 부끄럽지만 참여자로 지낸 예산의 5박 6일은  지옥 같았습니다. 당시의 저는 의지대로 이뤄지지 않는 이런 저런 일들을 겪으며 무력해진 상태였고, 새로운 사람과 환경에 적응하는 일은 평소보다 더욱이 버거웠던 것 같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고 싶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아도 맛있다는 음식을 먹어도 감흥 없는 날들이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손꼽아 기다리던 마지막 날이 왔고, 누가 잡을세라 얼른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습니다.


“예산을 아쉽게 보고 간 사람은 꼭 다시 오게 될 거예요.

언제든지 괜찮으니 다시 와줬으면 좋겠어요. 우리집에 편하게 있다 가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동안 도무지 적응하지 못하고 마지막 날만 기다렸던 저에게 케미스테이 운영진 분께서 해주신 말씀입니다. 참여자가 좋은 경험을 하길 바라며 기획했을 프로그램에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끙끙 앓다가 귀가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골치 아프고 속상한 일이었을까요. 그런데도 케미스테이 운영진 분들은 제게 미안할 만큼이나 따뜻한 말들로 배웅해 주셨고, 꼭 다시 예산을 찾아오라는 말을 덧붙이셨습니다.


그때 뭐가 그렇게 어렵고 힘들었을까 되돌아보면, 나답지 않은 선택들을 이어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내 안의 소리를 귀기울여 들어주지 않았어요.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일은 한 줄의 문장보다 훨씬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었고, 애써 무시하며 내가 아닌 다른 것들로 덮어보려고 했어요. 그러다 스스로가 너무나도 미워지는 지경에 이르렀던 겁니다.


나를 미워하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는 무력감에 빠졌습니다. 어떤 일에도 감흥이 느껴지지 않고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마치 어두운 터널로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끝없는 자기 부정은 꿈 많고 하고 싶었던 것도 많았던 저를 창조성이 아닌 파괴성으로 이끌었습니다. ‘이런 상태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 나는 해내지 못할 거야. 실패할까봐 시작하기가 두려워..’


그러다 예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 매거진을 만들어보자는 정수님의 연락에 두 번째 예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이번에도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가야할 것 같았어요. 다시 만난 예산에서 저마다의 가치관과 생각들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을 인터뷰했고, 상상만 하던 매거진을 완성했고, 케미스테이 팀에 합류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했습니다. 이곳에서 지내며 한 걸음씩 터널 밖으로 걸어나오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희 집에 편하게 있다 가세요’라던 재희님과 한 집에서 지낸 지 벌써 석 달을 채워갑니다. 예산역에서 케미하우스로 가는 낯설었던 그 길은 수십 수백 번을 오가며 너무나도 익숙해졌고요, 언제부턴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하는 여유도 생겼습니다. 예산에 뭐가 유명한지도 몰랐던 저는 OO식당에 어죽이 비린내도 없이 그렇게 맛있다며, OO카페에서 보는 예당저수지의 저녁 노을이 예술이라며 예산을 자랑하는 명예 군민이 되었습니다.


예산이 뭐가 그렇게 특별하냐고 물으면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무엇보다 소중하고 특별한 것은 함께한 사람과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침이면 ‘잘 잤어요?’라는 인사를 나누고, 한 집에서 밥을 같이 차려 먹고, 오늘 있었던 소소한 일들을 공유하고, 서로의 고민을 들어주기도 합니다. 어쩌면 공동체는 함께한 시간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해봅니다.


엊그제는 형형색색 자이언트 실을 잔뜩 사왔습니다. 그걸 보고 거실 바닥에 한 사람 한 사람 모여들더니 옹기종기 손뜨개질 모임이 벌어졌습니다. 우리끼리 나만의 손가방을 완성하는 걸로는 부족했는지 “이제 뜨는 법을 알았으니 원데이클래스를 열어보면 어떨까?” “플리마켓을 열어서 한번 팔아볼까?” “케미하우스에서 팝업스토어를 열어보자!”며 설렘 가득한 이야기가 오갑니다. 그러니까 이곳이 어디일지라도, 함께 꿈꿀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 특별하다고 말하는 수밖에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던 제가, 이 사람들과 무언가 해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변할 수 있었던 데는 저를 다그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려준 고마운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덕분에 예산에서 지내며 그동안 감추려고 했던 나의 모습을 마주했고, 불편한 감정을 피하지 않고 맞서는 연습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의 이해와 배려 속에서 나다운 삶을 찾아가고 있어요. 이 글을 빌려 저라는 서툰 사람을 품어주신 당신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어릴 적에는 "다음 주 수요일에 놀이터에서 만나자!”라고 말하지 않아도, 놀이터에 나가면 항상 있는 친구들과 꺄르르 웃고 뛰놀았었죠. 예산에서 만난 사람들이 바로 그런 존재인 것 같습니다. 내일도 무언가 함께하고 있을 것 같은,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그곳에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계절이 지남에 따라 믿음은 더 단단해져 가겠죠. 그 안에서 우리가 만들어갈 예산 공동체가 무척이나 기대됩니다.


어느새 눈 앞에 싸리눈이 그림처럼 흩날리고 있습니다. 따스한 온기와 추억 덕분에 예산에서 맞는 첫 번째 겨울을 따스히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아요. 우리는 어련히 피어날 새봄을 기다리며 케미스테이의 다음 스텝을 준비해 보겠습니다. 내년에는 <케미스토리 2024> 이름으로 ‘나’를 찾는 새로운 이야기들이 채워지겠죠. 예산에서 새로이, 그리고 또다시 만날 수 있길 고대합니다.


올해 동안 케미스테이를 찾아주시고 살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을 뒤로 하며 <케미스토리 2023>의 마지막 장을 맺습니다.



현재, 저는 서울에서 거주하며 주 2일을 예산에서 머무는 5도2촌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서울과 예산을 오가며 지내는 ‘듀얼라이프’ 이야기를 써내려갈 예정입니다.


곧 브런치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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