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시골 사이, 듀얼라이프
작년 10월부터,
본격적으로 예산에 내려와서 지내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잘 맞았다.
‘아무 것도 하기 싫어’ 병에 걸린 채
도시 밖 생활을 갈구했었고,
(한창 ‘서울 싫어’를 입에 달고 다녔다.)
어딘가 고장난 상태였던 나는
널널한 마음으로 지역에 스며들 수 있었다.
자극이 덜한 로컬 생활이 좋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주위를 둘러보며 괴로워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아침을 건너뛰고 오후 1시까지 늦잠을 자도,
주말 시간을 극히 비생산적으로 보내도,
SNS와 단절한 채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살아도,
그 누구도 나에게
“너 지금 잘못 살고 있는거야.”
라고 말하지 않았다.
‘잘 사는 것’의 표준은 없었다.
삶의 기준은 내가 정하는 것이다.
작년 하반기의 나에게는,
느린 시간 속에서 일상 속 작은 성취를 일궈가는 생활이 절실했다.
이를테면 집밥 해 먹기,
집앞 주짓수 도장에 출석 도장 찍기,
아침에 일어나서 영양제 챙겨먹기,
같은 것들 말이다.
한 걸음 한 걸음씩
내 안을 뒤덮고 있던 어둠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비교적 한가롭고 평온한 로컬이었기에
나를 오롯이 마주하는 보내며
회복으로 향하는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나에게 로컬 생활은 꼭, 필요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한정적이라고 느껴졌다.
매일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며칠 전에도 방문한 카페와 식당을 가고,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좋은 자극과 영감을 얻고,
매번 새로운 카페나 공간 찾아다니기를 좋아하고,
때로는 가보지 않은 길로 향하는 새로운 모험을 즐기는 사람이다.
나, 잘 살고 있나?
로컬 생활이 자극이 덜해서 편안하긴 하지만,
문득 이런 물음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좁은 지역에 머무르며
내가 사는 세상을 한정짓고 있지 않나?
더 넓은 세상과 배움을 멀리한 채
눈을 감고 있지는 않나?
진짜 원하는 것은 따로 있는데,
적당한 삶에 만족하며
나의 욕망을 외면하고 있지 않나?
지방에 있느라 놓친 기회들이 종종 있었다.
꼭 맞는 사람을 소개시켜주겠다며 연락이 왔는데
평일 저녁에 서울에서 만나는 일정이라
아쉬운 소리를 건네며 거절했고,
꼭 배우고 싶은 일이 있는데
매주 서울에 올라가서 교육 받아야 해서
잠시 접어둬야 했다.
그 밖에도 웬만한 체험이나 모임은 모두 서울에서 열렸고, 가까이 지내던 지인들과도 한 번을 시간 맞추기 어려워 근황 업데이트는 차일피일 밀려갔다.
5촌2도
5일은 촌에서, 2일은 도시에서 지내는
‘듀얼 라이프’를 일컫는 말이다.
나도 예산에 와서 처음 알게된 단어다.
‘평일 동안 지방에 지내다가
주말에 서울 가면 되지~’ 라고 생각했지만,
매주 서울에 가는 건
굉장한 체력과 비용, 시간을 요하는 일이었다.
서울과 예산을 오가는 교통비 17000원(+a)
집에서 역까지 택시를 타면 +5000원
기차에서 보내는 약 4시간
(나는 이동수단에서 일을 할 때 집중력이 팍 올라가긴 하지만)
청소, 빨래 등을 미루고 다녀오면 눈덩이처럼 불어날 집안일...
게다가 서울 집을 빼고 나니,
서울에 머물 곳이 없어 숙소를 예약했다.
서울에서 집 없는 설움이 이런 것인가.
5도2촌
나라는 사람은
도시 생활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다.
서울에서 새로운 일들과 도전을 펼쳐가는 사람들을 만나며 앞으로 나아갈 추진력을 얻고,
새로 생긴 공간들과 팝업, 전시 등을 보러다니며 일상을 예술로 바라보는 감각에게 물 주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 작은 날갯짓은 모이고 모여
커다란 기회로 찾아온다.
오늘은 내 인생 처음으로
인터뷰를 당하는 입장이 되었다.
항상 기자로서, 에디터로서,
인터뷰이의 말을 곰곰이 듣고 질문하는 입장에 있었는데, 오늘처럼 내 얘기를 쏟아내는 시간이 낯설었다.
그보다 나의 이야기를 먼저 궁금해 해준 사람이 있음에 놀랍도록 기뻤다.
오늘의 기회는
타성에 젖어 사업 스터디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난 번 서울에서 열린 그룹 세션을 가지 않았다면,
절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5도2촌’의 삶을 택하기로 했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5촌2도, 5도2촌.
3촌4도, 4도3촌.
각자에게 맞는 라이프스타일은 모두 다를 것이다.
나의 상태와 시기에 따라서도 맞는 바가 다를 터.
동굴 밖으로 나올 힘을 장전한 2024년의 나는
도시 생활의 비중을 좀 더 높여보려고 한다.
사람을 통해 연결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힘 닿는대로 잡아볼 것이다.
한편,
예산에서 보내는 이틀 동안은 몸 담은 지역에서 좋은 쓸모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조그만 대안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지역신문의 객원 기자로서 동네를 누비고,
정다운 공간과 사람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담고,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몸 던질 것이다.
인연이 닿은 지역에서 무언가 한다는 것만으로
나에게는 굉장한 의미를 지니니까.
작년의 내 두 발이 가리킨 곳이
다른 지역도 아닌 예산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부지런히 이어갈 것이다.
예산을 떠나는게 아니다.
나에게 맞는 라이프스타일로,
도시와 로컬의 비중을 조정하는 것이다.
드넓은 세상을 유영하다가
내 삶이 조금이나마 안정된다면,
그때는 다시 로컬의 비중을 높이고 싶어지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여전히 로컬을 사랑하니까.
푸르고 널찍한 바다가 보이는 마을에서
<요가 하우스>를 운영하는 꿈을 그리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