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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가안내자 옥돌 Feb 07. 2024

첫인상

24.01.26.

오랜만에 예산에 내려왔다.​

서울 집에 있던 짐을 한 무데기 가지고서.

겨우 예산 집에 도착해서 몇 자 적는다.

<쓸 게 없다뇨, 이렇게 많은데> 전자책을 기차에서 읽으면서 왔는데, 일상의 사소한 순간도 글감이 될 수 있다는 말에 바로 블로그를 열었다.

별 것 아닌 일상일 수록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살 수 있다는데, 나는 참 오랫동안 갖은 핑계를 대며 ‘당장 쓰기’를 미뤄왔던 것 같다.

특별한 소재가 없어서,

지금은 준비가 되지 않아서,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나중에 더 완벽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삶은 단 한 사람의 이야기


위 문구가 마음에 쏙 든다. 개인이 겪은 삶은 이 세상 유일무이한 이야기가 된다.

그냥 쓰기로 했다.

더이상 미루지 않고, 대담하게.



오늘은 서울 집을 빼기로 한 날이다.

어제부터 하루 종일 짐을 싸고, 새벽 일찍 일어나 박스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이제 예산으로 간다.

양손 무겁게 짐을 챙기고서, 용산역으로 가는 택시를 불렀다.

하도 짐이 많은 탓에, 서둘러 나가는데도 몸이 천근만근이다. 골목길 집 앞에는 택시 한 대가 기다리고 있다.

“어유. 많이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내 몸 전체를 휘감은 짐들을 보셨는지 기사님께서 얼른 차에서 내려 트렁크를 열어주신다. 안 그래도 무거운데 짐을 함께 들어주시니 이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

“좀 기다렸네요~. 괜찮아요. 추운데 얼른 타세요.”

간혹 택시를 불러놓고 조금이라도 늦게 나오면 역정을 내시는 기사님들도 계신다. 혹여나 아침부터 기사님의 심기를 건드렸을까봐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는데, 오히려 사람 좋은 목소리로 화답해 주신다.

용산역으로 가는 길, 차가 너무 많아서 잠시 정체되었다. 혹여나 기차 시간에 늦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기사님께 여쭈었다.

“차가 많이 막힐까요..?”

“여기 구간에서만 잠깐 그래요. 5분이면 도착할 수 있으니 걱정 말아요.”

문자로는 미처 담기지 않을 따스함이 묻어났다. 어떻게 말 몇 마디에 배려와 존중과 따뜻함을 채워 상대방에게 건넬 수 있을까, 처음 만난 기사님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사히, 늦지 않게 용산역에 도착했다. 짐을 들고 내리느라 끙끙거릴 새도 없이 기사님께서 트렁크를 열어 캐리어를 꺼내어 주셨다. 양손 무겁게 짐을 안고 가면서도, 온몸으로 건네 받은 따스한 배려 덕분인지 기차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리고 기차로 두 시간, 예산에 도착했다.

양손도 모자란 짐덩어리를 들쳐메고 택시를 타러갔다. 창문을 똑똑 두드리고 기사님께 트렁크를 열어달라고 부탁드렸다. 짐 싣는 걸 도와주시는게 당연한 일은 아니지만, 괜히 지쳐있었던지라 아침에 만난 서울 기사님 생각이 났다. 낑낑거리며 짐을  싣고나서 뒷좌석에 탑승했다.

“어디까지 가?”

본인보다 어린 나이일테니 반말로 물으시는건가. 기분이 언짢았지만 티 내지 않고 담담히 답했다.

“산성리 OO 아파트요.”

좁은 마을 바닥, 아파트 이름만 말해도 어딘지 다 아실 터. 일단 출발은 했다. 모쪼록 무사히 택시에서의 시간이 지나가길 바라면서.

“어느 쪽이야?”

“오른쪽으로 꺾으면 돼요.”

“아니. 여기 말고 저기서 어디로 가냐고.”

“아...”

“몇 동인데.”

“000동요.”

짧은 문장들이 오갔다. 늘어가는 문장 수만큼 내 얼굴은 일그러져 갔고, 손님으로서 아니, 사람으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기분으로 더이상 이 차에 있고 싶지 않았다. 제발. 빨리 내리게 해줘.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며 집 앞에 도착했다. 잘 가시라는 둥 형식상 인사 치레도 없었다. 나야말로 반말로 얼룩진 공기 속에서 빈말의 덕담도 건네고 싶지 않았다. 입을 닫고 묵묵히 홀로 짐을 꺼냈다. 어련히 할 법한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도 꿀꺽 삼켰다.

근 3주만에 예산에 내려왔는데, 오자마자 만난 사람이 반말 공격수 택시 기사님이셨다. 하필이면 오늘 아침, 서울에서 만난 택시 기사님은 유난히 친절하고 젠틀하셨다.

슬펐다.

예산에 연이 닿고난 이후로 내가 살아가는 동네를 사랑하고 싶었는데, 오랜만에 마주한 첫인상이 썩 정답지 못해서.



​누군가에게는 내가 어떤 공간이나 지역, 또는 분야에 있어 첫인상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명상이 처음인 분이 나를 통해 명상의 첫인상을 가지실 수도 있고, 예산에 처음 온 사람이 가장 먼저 대화를 나누게 될 사람이 나일 수도 있다. 어떤 공간에서는 그곳에서 근무하던 나를 브랜드의 첫인상으로 바라봤을 수도 있겠지. 우연히 만난 첫인상이 참 중요했겠구나.

그럼 나는 누군가에게

무엇의, 어떤 첫인상으로 남을 수 있을까?

가장 먼저 영어 선생님으로 나를 맞이해줄 사과꽃 발도르프학교 아이들이 떠오른다. 그 아이들에게는 내가 영어라는 세계의 첫인상이 될 수 있겠구나. 또는 발도르프 학교에 대한 첫인상이 될 수도 있겠지.

말과 행동, 무엇 하나 주의를 기울여서 써야만 하겠다. 늘 깨어있으며, 알아차리는 삶 속에서 살아가다보면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첫인상으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아직 예산에 머물며 무엇인가 해보고 싶은데는 예산의 첫인상을 아름답게 심어주신 많은 분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당호 일출을 기다리며 두 손을 모으고, 봉대미산 노을에게 감탄하고, 무한천 밤산책의 묘미를 공유하고, 한여름의 수덕사부터 눈 덮인 황새공원의 그림을 두 눈으로 담았던.

글의 말미를 장식하기에 다소 식상하지만, 인사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너무 감사해서. 감사한 이들이 너무 많아서.

나의 첫인상이 되어주신 여러분, 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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