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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삼 Jun 08. 2019

지난 것들의 아름다움

1. 원두막의 비밀

  등하교 길, 오가며 늘 부럽게 바라보던 참외 수박밭이 있었다. 시장 가시는 어머니를 따라갔던 보람이 있었는지 오는 길에 그 참외밭 원두막을 들르게 되었다. 

원두막에 올라 사방을 보니 멀리서 보는 것 하고는 다르다. 작은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면 대여섯 앉고도 남을 넉넉한 공간이 있고 사방이 훤히 보인다. 그런가 보다. 원두막 위에서의 시원함이란 바람이 불어서라기보다는 앞이 훤히 트여서 느껴지는 시원함이 더 큰 것 같다. 그 밑은 한길 정도의 높이에 두어 평의 공간이 있어 따다 놓은 참외와 소쿠리도 보관하는 곳이 있다.  


  어머니께선 식구들 줄 것 대여섯 개를 사고 원두막 주인이 개평으로 내어놓은 조금씩 상한 참외를 깎아 내게 주셨다. 그것을 와작 깨물며 기다란 밭 끄트머리를 보는 순간 하마터면 비명소리를 지를 뻔했다. 

며칠 전 또래의 녀석들과 이곳을 지나다 두 녀석이 몰래 밭고랑을 기어 들어가 채 익지도 않은 시퍼런 참외 몇 개를 따서 던져주어 그것을 가지고 밭두렁 밑을 기어 산길로 치달아 설익어 씁쓸한 참외 맛을 보았었는데, 지금 이곳에서 보니 그 밭 귀퉁이가 훤히 보이는 게 아닌가. 그러니 누구누구 그 짓 한 놈들을 뻔히 알 텐데 이 아줌마는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와 수다가 늘어지고 있다. 

가슴에 방망이질이 시작되고 아줌마 얼굴을 쳐다볼 수도 없다. 더 먹으라며 두어 개 더 내놓았지만 그 자리에 있기에는 그리 뻔뻔하지 못했다. 한 개를 들고 원두막 아래로 내려왔다. 조금씩 상한 참외들이 한 산태미(‘삼태기’의 충청도 사투리)는 족히 쌓여 있고 그곳에 벌과 파리가 꼬여 윙윙대고 있다. 흙 한 줌을 집어 홱 뿌렸다. 맞아 죽은 놈은 한 놈도 없는지 금세 또 꼬여 윙윙댄다. 

밭 가장자리 쪽을 보았다. 원두막 위에서 보이던 그 귀퉁이가 보이지 않는다. 가장자리 쪽이 낮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 날 원두막 위에 사람이 있었다면 영락없이 눈에 띄었을 텐데 아주머니 눈치는 그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밭에서 일하던 중이었다면 분명 못 보았을 수도 있다. 

"근데 말이야. 저쪽 밭 가 몇 포기는 내놨구먼 유! 애들이 오면 가면 새파랄 때부터 따 제켜서 아예 그러려니 하는구먼 유!" 

"그래도 그렇지 힘들게 가꾼 건데 붙잡아 따끔하게 혼쭐을 내야지. 그렇게 키워 서 뭘 한데 글쎄" 

벌렁거리는 심장소리로 혹여 탄로가 날까 도저히 그곳에 있을 수가 없었다. 아마 지금 내 얼굴은 백지장이 되었을 게다. 엄마와 같이 집에 가다가는 눈치 차이기에 맞춤일 것이란 생각이 들어 '먼저 갈게요'하고는 줄행랑을 놓았다. 뛰면서 생각해 보았다. 내가 왜 겁먹고 있지? 나는 참외를 딴 적은 없잖아. 단지 밭둑 밑으로 던져 주는 거 가져다 같이 먹은 것뿐인데. 그것도 두어 입 밖에. 

어쨌든 도둑질한 놈이나 그것 같이 먹은 놈이나 한패 거리니 마찬가지지…….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나를 면죄해 줄 만한 핑곗거리가 마땅찮다. 

그런데 그 아줌마는 다 알면서 왜 붙잡아 혼내지 않았을까? 


동네에 가던 길로 녀석들이 있을만한 웅덩이로 향했다. 녀석들은 지금쯤 웅덩이에서 미꾸리 움켜잡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가뭄으로 웅덩이 물이 거의 바닥이 났을 테니 말이다. 

엎치락뒤치락 소리를 지르며 그 녀석들 있는 곳으로 달리자 무슨 일인 가하여 고개를 빼물고 일제히 나를 쳐다보고 있다. 

"야! 야! 지랄 났어. 니들. 먼젓번에 참외 서리한 거 참외 밭주인이 다 알아!" 

"그런데?" 

"우리가 참외 서리한 거 다 아는 눈치라니까!" 

"야, 무슨 증거 있니? 벌써 똥 돼서 밭에 뿌렸어. 배 째보라지!" 

녀석들 배짱이 보통이 아닌 것 같았다. 괜히 나만 멀쑥해졌다. 미꾸리 잡이도 내키지 않고 하여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께서는 그새 집에 오셔서 마루에서 참외를 깎고 계셨다. '더 먹어라'하셨지만 덥석 손이 가지 않았다. 엄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도 없다. 내일부터는 그 놈들보다 앞서서 다니던지 뒤쳐져 다녀야겠다. 보아하니 그 놈들 겁먹은 표정이 아니야. 또 그럴게 뻔한데 그러다 걸리면 얼마나 망신일까. 어머니한테는 얼마나 혼나겠어. 온 저녁을 그 생각에 빠져 식욕까지 달아나버렸었다 


  50여 년 전, 인근 몇 동네를 뒤져도  한두 곳밖에 없던 원두막. 그 원두막은 늘 아이들의 시선이 집중되던 곳이었고 서리의 표적이었다. 

그때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아이들의 작은 장난을 크게 탓하지 아니하였다. 지금에 와 되돌아보면 그때의 원두막 주인도 우리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뻔히 알면서도 시침 뚝 따던 그 시절의 인심이란 지금처럼 야박하지 않은 가난 속의 여유처럼 느껴진다. 마땅한 간식거리도 없던 시절이라 아이들이 어쩌다 저지르는 충동적 행동을 그러려니 하고 이해를 한 것이다. 참외 수박뿐 아니라 콩, 고구마, 옥수수, 무 그리고 흔치 않던 사과도 서리했으니 지금 세상에서는 상상도 못 할 나눔의 정이 있었다고나 할까 


서리를 할 때는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었던 것 같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모두들 그렇게 지켜가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스스로들 터득한 노하우인 것이다. 


첫째는 먹을 때가 되었을 때 해야 한다는 것. 너무 어려 먹지도 못할 것을 따다가 버리면 호된 꾸지람을 받았다. 먹는 것 가지고 그러면 죄받는다고. 


둘째는 먹을 만큼만 해야 한다. 지나치면 장난이 아니라 도둑질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심하다 싶으면 붙들려도 더 혼났고 온 동네 소문이 나기도 했다 


셋째는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하고 또, 같은 장소에서 계속 저지르는 것은 우둔한 짓이다. 추적이 용이하고 쉽게 붙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어쩌다 한 번만 할 일이다. 왜냐하면 그 행위를 하는 동안의 짧은 시간. 간장은 졸아붙어 콩알만 해지는 것 같고 펄떡이는 심장의 고동이 원두막까지 들릴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오금이 저려오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맛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야 잊히지 않을 만큼의 스릴 있던 행위로 기억되지만, 서리해 먹는 맛의 쾌감은 짧았고, 서리를 성공하기까지의 시간은 너무 길다고 느껴졌다.


지금 우리는 이웃들의 아량과 베풂이 사라진 시대에 산다. 아이들의 충동적 행동에 관대하고 이해심을 내세웠던 미덕은 요즘 세상 사람들에게는 상상하지 못할 일로 보일 뿐이다.

우리 아이들은 어떤 일들로 추억거리를 만들어 훗날 내 손자에게 들려줄까? 


참외와 수박이 지천으로 널린 계절. 슈퍼까지 갈 것도 없이 전화 한 통이면 시원하게 해 놓은 것을 배달도 해 주고, 집 앞까지 다니며 세일 전까지 펼치고 있다. 모든 것이 풍족한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풍족하다고 느끼며나 살고 있는지? 


금방 사온 미지근한 참외를 쪼개어 앞에 놓으니 어린 시절 가슴 콩닥이던 순간들이 영상으로 펼쳐진다. 산비탈에 숨어 먹던 미지근하고 덜 여물어 씁쓸한 맛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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