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삼 Jun 09. 2019

지난 것들의 아름다움

2. 보리밭을 그리며


  모처럼 도심을 벗어나 단양의 어디쯤 한적한 지방도를 따라 차를 몰았다. 길 가장자리로 길게 서너 줄 보리가 심겨있다. 제법 긴 거리이다. 요즘 많은 자치단체에서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한 시책을 추진한다더니 보리 심기를 해 놓은 것이다. 길가의 조금 넓다 싶은 공간에는 어김없이 보리밭이다. 이만하면 충분히 추억을 떠 올릴만한 동기부여가 될 듯싶다.


차에서 내려 한참 만져보고 냄새도 맡아본다. 손끝으로 정전기 같은 짜릿함이 느껴진다. 제법 아랫배가 불룩한걸 보니 곧 이삭을 피어 올릴 것 같다. 이삭을 밴 수잉기다. 보리는 결실기보다 이삭을 품고 있는 시기가 아름답다. 만삭의 보리밭은 태교 하는 아내의 모습처럼 고결해 보이기 때문이다. 희망을 잉태하고 있음이다. 낯설지 않은 그 몸매가 그리웠기 때문일까. 코끝으로 느껴지는 풋풋함으로 온몸이 파란색으로 변하는 것 같다. 


눈을 꼬옥 감으면 골짜기 가득한 보리밭에 은빛 파도가 출렁인다.  수수수 바람이 지날 때마다 떼 지어 몰려다니는 개구쟁이들이 보인다. 


  보리밭 어디쯤 있을 것 같은 종달새 둥지를 찾아 헤매었지만 보리밭에서 그놈 알이 들어있는 집을 찾아낸 적은 없다. 하늘 저 높이 떠서 안달하듯 종알거리다가 팔매질한 돌멩이 떨어지듯 갑자기 보리밭으로 메어꽂는다. 그곳이 집이거니 하고 가보지만 늘 허탕을 쳤다. 영악한 놈이라 거기서부터 한참을 기어 제 집으로 간다니 그런 것 알 턱이 없는 꼬맹이들은 당연 허탕을 치곤 했던 것이다.


어느 날 혼자서 걷는 보리밭 이랑에서 푸드덕 꿩 한 마리가 날아 달아날 때 놀란 가슴은 보리밭 근처만 가면 가슴이 두근거리게 하는 사건이었다. 앞이 노랗게 보이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놀라움을 진정시키고, 돌멩이를 주워 힘껏 저만치 날아가는 꿩을 향해 던진다. 돌멩이는 포물선을 그리며 "씨이-팔" 소리를 내며 밭두렁으로 쳐 박힌다.


보리 대궁 하나를 톡! 꺾었다. 오래 전의 솜씨로 피리를 만들어 본다. 줄기가 툭 터진다. 소리가 없다.

"보리밭 샛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보리밭'하면 가곡 한 소절이 떠오른다. 이 노래만큼 많은 이의 입을 오르내린 노래가 또 있을까? 혼자서 걷는 들길에서 길게 목청 뽑아 한 소절 불러보고 싶은 노래이다. 까치발 뛰며 노래 부르던 어린 시절 모습은 그리는 것만으로도 상큼한 맛이다. 때 묻지 않은 청순함이다.


  청보리 한 움큼을 훑어 비비면 작은 손바닥 위에 오르르 파란 알곡이 수줍다. 한 알씩 입에 넣으며 배고픔을 달래던 흑백 필름 속의 코흘리개가 낯설지 않다. 

바람이 일 때마다 푸른 골을 휩쓸던 은빛 파도를 그려본다. 삐리~ 리 보리피리 불며 종달새 녀석과 숨바꼭질하는 영상이 손에 잡힐 듯 지나간다. 풋풋한 청보리 맛에 군침이 돌고 연인들의 부푼 가슴이 푸른 들판에 찰랑인다.

"개똥이 방구는 보리방구."하며 벌벌 벌벌 휘돌아 치는 꼬맹이들의 메아리가 들리는 듯하다.

모처럼의 외출에서 대단한 것을 얻은 기분이다. 보리의 수확이다. 그것도 입안에 톡톡 터지는 청보리의 수확이다

작가의 이전글 지난 것들의 아름다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