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날로그 인간이다. 공부할 때 태블릿 PC로는 도저히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 모든 문서를 종이로 출력해서 펜으로 줄을 쳐 가며 읽어야 하는 사람. 오답 노트를 쓸 때도 틀린 문제를 가위로 오려내어 다른 공책에 딱풀로 붙이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면서 개발자는 어떻게 하는 거야?”
친구가 물었다. 그러게나 말이야. 뭐든 종이로 읽고 손으로 기록하는 게 더 좋은 사람인데. 나도 내가 어떻게 모니터로 코드를 읽고 키보드로 코드를 쓰는지 궁금하다. 가끔 코드를 종이로 출력하고 싶을 때가 있다. 엔터를 누름과 동시에 코드가 실행되는 그 쾌감이 아니었다면, 그 순간에서 쾌감을 느끼지 못했다면 개발자를 선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정말 ‘적성에 맞았다’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은 것은 감사해야 할 일이다. 적성 덕분에 아날로그 인간이 컴퓨터와 부대끼며 살아가고 그 일로 돈을 벌다니. 대단하잖아. 그래도 여기서 만족할 수 없다. 잘하고 싶다. 더 잘하고 싶다. 많이 잘하고 싶다.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어디까지일까? 계속 올라가고 싶다. 더 많이, 더 높이. 그런데 왜 잘하고 싶지?
처음에는 멋진 개발자가 되고 싶어서 그런 건 줄 알았다. 하지만 끝없는 질문이 나를 괴롭혔다. ‘멋진’ 개발자가 뭔데? 돈 많이 벌고 대기업 다니는 개발자? 그런 개발자가 되고 나면? 그러면 끝이야? 더 이상 개발자 안 해? 그러면 처음부터 개발자는 왜 하는데? 돈과 명예. 분명 매력적인 보상이다. 그런데도 ‘정답’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만족할 만한 정답을 찾기 위해 머리를 싸맸다. 기억의 책장을 조금씩 더듬자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그건 고등학교 1학년 국어 시간. 나는 발표를 하고 있었다.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을 돕기 위한 웹사이트를 만들겠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IT 기술을 사용하겠다고 생각했다. 기술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라고 당시에도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내가 개발자가 되어서 직접 만들겠다는 의도는 아니었고. 사람을 고용해서 만들겠다는 의미였다.
과거의 나는 세상에 도움이 되는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그걸 오래 잊고 있었다. 시험에, 취업에 휩쓸려 사느라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사실 개발자로서 지금 당장 더 잘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못하지 않는 정도에서 그쳐도 된다. 하지만 그걸 용납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마음속 어딘가에 있다. 그 목소리가 자꾸 나를 일으켜 세운다.
‘나는 세상에 도움이 되고 싶어.’
개발자의 덕목이라고 불리는 소양은 많다. 그런 덕목이 강조하는 건 개발자가 ‘어떻게’ 개발해야 하는가이다. 나 역시도 그런 부분에 집중하며 달려왔다. 그러다 그것만으로는 나의 성장 욕구가 설명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왜’ 개발을 하는 거지? 멈춰 서서 생각할 시간도 없이 달려온 지난날. 달려가면서도 공허함을 느끼던 날.
언젠가 스스로 추가 공부의 필요성을 느껴 코딩 강의를 찾아본 적이 있다. 그때 일반인에게 프로그래밍을 알려주는 무료 온라인 강의를 들었다. 강사님은 처음부터 수업을 진행하지 않았다. 대신 오리엔테이션으로 기술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설명하셨다. 학교에서도 듣지 못했던 이야기를. 기술이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그리고 그런 기술을 배운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될지 들려주셨다. 강사님의 목소리에서는 자부심마저 느껴졌다. 그 자부심에 감화되어 다시 한번 생각했다. 나는 길을 잘 선택했다고. 내가 배운 기술로 세상에 변화를 줄 수 있다고.
이제 내게 멋진 개발자는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주기 위해 기여하는 개발자이다. 사회적 문제를 발견하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고충을 덜어줄 수 있는 사람. 혹은 그런 도움을 주는 집단의 일원이 되는 일. 나는 여전히 ‘멋진’ 개발자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