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초량 Dec 09. 2023

재회

“안녕하세요. 저는 서초량인데요.”

“네.”

“혹시 B 휴대폰 맞을까요?”

“맞습니다.”


숨을 들이켰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오랜만이야. 나 기억해?”

“기억하지.”


귓가에 울리는 익숙한 목소리.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목소리를 듣는 건 9년 만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처음이었으니까.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고픈 말이 많았다. 우선 전화를 건 이유부터 말하기로 했다.


“지인과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하다가 네 생각이 나서 연락했어.”

“그렇구나.”


단답. 여전한 단답. 그 한마디마저 반갑고 그리웠다. 그래, 너는 그랬지. 무뚝뚝한 표정과 무덤덤한 말투로 상냥하게 행동하던 너를, 나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을 잊고 싶었다.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힘들고 괴로운 기억뿐이었다. 아파하고 몸부림치는 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때로는 따돌림당하고 때로는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나는 그 시간을 아파했다. 그래서 잊으려고 했다. 졸업 후엔 사이가 나빴든, 나쁘지 않았든 고등학교 지인이면 연락처를 차단했다. 그중엔 B도 있었다.


그렇게 9년이 흘렀다. 긴 시간 동안 상처는 아물고 딱지가 내려앉았다. 건드리면 따끔했지만 전처럼 아프지 않았다. 조금은 덤덤하게 과거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랬었지. 그런 날들이 있었지. 그런 내가 있었지.


“있잖아, 고등학교 때 말이야. 우리 학교에는 생일에 매점에서 작은 과자를 사다가 포스트잇에 쪽지를 써서 붙여주는 문화가 있었거든? 나랑 B는 3년 내내 같은 반이어서 B 생일을 3년 내내 챙겼단 말이야. 고3 때 B 생일날 항상 그랬던 것처럼 과자랑 쪽지를 챙겨줬어. 걔가 그걸 받고 공책을 하나 꺼내서 맨 뒷장에 쪽지를 붙이더라고. 근데 그 공책에 내가 고1, 고2 때 줬던 쪽지가 나란히 붙어있었어.”


내가 9년 만에 B에게 전화한 이유다. 지인과 대화하다가 이 일화가 떠올라서. 왜 쪽지를 버리지 않았어? 3년 동안 왜 그걸 다 가지고 있었어? 어째서야? 무슨 이유야?


연달아 B와 관련된 일화가 떠올랐다. 수학을 못 해서 힘들어하던 나. 이과인데도 수학을 너무 못했던 나는 자주 울었다. 울고 있는 나를 덤덤하게 위로하던 B. 그 무뚝뚝한 아이가, 하는 말이라고는 단답밖에 없는 애가 나를 위해 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 나는 자주 배가 아팠다. 병원에 가도 딱히 원인이 없다고 했다. 스트레스성이라고. 배가 너무 아파 걷지도, 앉지도 못하고 교실 바닥에 쓰러질 때도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종례가 끝나고 다들 교실을 나가는데 또 배가 아팠다. 일어나다가 바닥에 주저앉았고, 신음을 흘리며 웅크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B였다. 괜찮아? 나는 B의 걱정하는 표정을 처음 보았다.


기숙사로 책장 옮기는 것을 도와주던 너, 후드를 뒤집어쓰고 다니던 내게 후드 모자를 벗겨주던 너, 동생에게 선물 받은 소중한 인형을 떨어뜨렸을 때 주워주었던 너, 옆모습이 잘생겼다는 나의 말에 환하게 웃던 너.


많은 순간에 B가 있었는데. 그걸 다 잊고 있었구나. 너를 좋아했었어. 맞아, 그랬어. 네 옆자리에 앉아 수업 듣는 시간이 즐거웠어. 연극제 때 너와 같이 경찰 역할을 해서 기뻤어. 계속 같은 반이 되어서, 같은 반이라는 이유로 말을 걸 수 있어서 좋았어.


고마웠어. 많이 고마웠어.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지만 고마웠어. 너를 만나고 싶어. 이제는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어디 살아?”

“봉천.”

“나는 신대방인데. 가까이 사네. 한번 만나자.”

“그래.”


이렇게 쉽게 만날 수 있었구나. 내가 다가가면 이렇게 만날 수 있었구나. 사실 나 조금 궁금해. 그때 너는 나를 좋아했어? 아냐, 아니었다고 해도 너는 나의 소중한 추억이야. 안녕, 다시 만나서 반가워.

작가의 이전글 그곳이 성공은 아닐지라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