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너무나도 뜬금없는 주제로 남편과 대화를 나누었다.
(시나 : ‘시간나무’의 준말)
남편 ❙ 나도 당신한테 "작가"라고 부를까?
시나 ❙ 아니, 그러지 마.
남편 ❙ ❍❍이는 ❍❍씨에게 "이 작가"라고 부르잖아.
시나 ❙ ❍❍씨는 등단한 작가잖아.
남편 ❙ 그래? 그럼, 당신은 산을 좋아하니까 등산하는 작가잖아. 그러니까 "작가"라고 불러야지.
나는 웃고 말았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며 외출을 하였다.
남편은 친구가 친구의 아내에게 작가라고 부르는 것에, 남편도 나에게 작가라고 불러보고 싶은 마음에 건넨 이야기였는데.
부끄러운 마음에 등단을 하지 않은 작가니까 그렇게 부르지 말라는 나의 반박에, <등단>에 맞는 라임으로 <등산>이라는 단어를 선택하여 나에게 위로를 건네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을 안다.
그런데, 생각해 보았다.
등산이란 운동, 놀이, 탐험 등의 목적으로 산에 오르는 행위로.
어쩌면 나의 목적인 '글쓰기산'에 오르기 위하여 지금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야 결국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것으로, 등단하기 전에 등산을 하는 것이 순서이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남편 생각대로 등산하는 작가도 작가로 불러도 되지 않을까?
이미 '글쓰기산'에 오르기 위하여 출발을 하였으니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 어떤 날 남편이 오늘과 같은 주제로 다시 이야기를 건넨다면, 그때는 모른 척 그냥 들어줄까?
('글쓰기산'의 정상을 등단으로 비유한다면 등단을 하기 위하여는 등산이라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것이 순서라는 아주 단순한 생각을 한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등단이라는 목표를 품고 있지는 않다. 지금은......)
아침에 남편의 말에 웃었던 내가, 오후에는 나의 엉뚱한 생각에 또다시 웃고 말았다.
누구나 자신만의 높은 산이 있고,
그 산꼭대기에 자신만의 꿈이 기다리고 있다.
그 꿈에 다다르기 위하여
지금 춥고 어둡고 비바람 몰아치는 길 위에 서 있다 하여도,
멈추지 않고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나의 높은 산, 그 산꼭대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나의 꿈에 데려다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