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에 대하여

by 시간나무

정!

가족 간의 감정(부모님에 대한 존경, 형제자매 간의 우애)과는 다른 결의 감정으로, 내 마음속 많은 자리를 차지한 건 바로 우정이었다.

나는 나만의 우정이란 개념을 어학사전의 풀이(우정이란 친구 사이의 정)에 충실하였기에 친구란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며, 정이란 사랑이나 친근감을 느끼는 마음으로 두 가지가 충족되었을 때 우정이라 스스로 말하곤 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던 나만의 우정 앞에 갈등을 빚은 적도 몇 차례 있었다.


20살의 겨울 어느 날, 학교에서 만난 같은 과 친구(그때는 친구라고 부르지 않았다)와 커피 한잔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우정이란 주제에 이르게 되었다. 그 친구는 나를 친구라 불러 주었으나, 나는 아직 친구라 부르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때, 그 친구의 놀란 두 눈과 그 눈에서 떨어지던 눈물방울이 기억난다. 그리고 그 친구는 "학교생활을 일 년이나 같이 했는데도 친구가 아니라고?"라고 말했다.

물론, 친구라 불렀을 때 대답 대신 변명을 하는 나를 보고 당황하였겠지만, 나의 설명에 "아! 너는 그렇구나!" 하며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친구의 반응에 사실 나도 놀랐다.

나는 내 기준의 친구, 내 기준의 우정으로 내 마음에 자리 잡기에 일 년이란 시간은 짧다고 느꼈기에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고, 동시에 내 기준을 고집한 내가 어리석은 건 아닐까 하는 자책감이 가슴에 작은 불씨처럼 피어올랐다.

나도 안다. 그래서 참 많이도 들었던 말이다. '갑갑하다', '답답하다', '고지식하다'

그러나, 나만이 아는 나도 있다. 내 마음에 한 번 친구로 우정으로 자리 잡으면 쉽사리 그 자리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가는 길이 멀어 운동화끈을 몇 번이고 다시 매는 상황에서도 이 길을 선택한 것은 내가 바라는 단단한 우정을 위해서이다.


중장년의 끝자락에 머물면서 나에게 우정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되짚어본다.

우정이란 단어에 내포되어 있듯이, 우정에는 사람, 시간 그리고 감정의 조화가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우정은 감정에 속할까? 우정은 신뢰, 이해, 배려, 실망 등 여러 감정이 얽힌 관계로 누군가와 친구가 되었을 때 느끼는 편안함, 위로받음, 그리움, 감사함은 분명 우정을 감정으로 볼 수 있게 한다.

그럼, 우정은 생각에 속하지 않는 것일까? 최소한 나는 누군가를 친구라고 규정할 때, 친구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은 인지적 판단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에 우정이란 생각으로 볼 수 있게도 한다.


격렬한 감정은 생각의 샘을 흐리기도 하고, 굴절된 생각은 감정의 바람을 휘몰아치기도 하지만, 고요한 감정은 생각의 샘을 맑히기도 하고, 투명한 생각은 감정의 바람을 잠재우기도 하므로, 우정이란 감정이거나 생각이라고 구분 짓기보다는, 감정과 생각이 어우러진 상호 존중의 관계라고 나는 결론을 내려본다.



말 알고 싶다.

내가 알고 있는 우정과 네가 알고 있는 우정.

내가 바라는 우정과 네가 바라는 우정은 같은 방향일까?

내가 우정이라고 말한 것은, 우리는 이미 시간과 감정의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우정은 가족과는 다르게 선택의 결과이지만, 그 선택이 수없이 반복되기도 한다.

때로는 멀어지기도 하지만, 다시 가까워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수십 년 이어지는 우리의 관계에서 느끼는 이 마음. 친구 간의 정은 어느 날 갑자기 솟아난 것이 아닌 오랜 시간이 정성껏 빚어낸 귀한 감정이고, 그래서 이 감정이 겹겹이 쌓일수록 우정은 더 단단해지는 것이 아닐까?

결코, 우정은 우연히 단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문득, 중국 춘추전국시대에서 비롯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란 사자성어가 생각난다. '너무 가깝지도 않게, 너무 멀지도 않게'하라는 중용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서 현재까지도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고슴도치 딜레마'와도 유사한 뜻으로 고슴도치들이 추위를 느끼고 서로 가까이 다가가지만 이내 서로의 가시에 찔려 아픔을 피하려 다시 떨어지고 마는 데서 비롯한 딜레마로 추위와 아픔 사이에서 적절한 거리 유지가 필요하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그럼에도, 절박한 필요에 의해서는 가시에 찔려서라도 최대한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은 사람은 고슴도치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COVID-19 이후,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이 생겨나면서 사람과 사람과의 거리 두기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것처럼, 우정의 거리 두기도 필요할 것 같다.


오랜 시간 함께 한 우정은 어쩌면 지난 시간을 회상하다 앞날의 시간에 무뎌질 수도 있으니, 우리의 육체가 늙어가는 것과 발맞추어 우리의 우정을 함께 할 시간도 줄어들고 있음을 인정하고 그 시간을 잘 유지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하지 않을까?


오랜 시간 마음을 나눈 우정은 어쩌면 많은 마음을 보았기에 낯선 감정에는 들여다보지만 익숙한 감정에는 스쳐 지나갈 수 있으니, 우정이 깊을수록 오해와 이해 사이에서 더 이해로, 갈등과 융화 사이에서 더 융화의 방향으로 갈 수 있는 마음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제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물리적인 나이 앞에, 더욱 성숙한 우정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신뢰를 기반으로 다름을 이해하고, 변화를 인정할 수 있는 것일까?

다름을 이해하고, 변화를 인정하는 가운데 신뢰를 축적할 수 있는 것일까?

무엇이 되었든, 우정은 감정과 생각의 연대이고, 거리 두기이자 기꺼이 거리 좁히기이며, 선택이었으나 존속의 관계이다.

나는 친구와의 우정이란 이름을 오래 부르고 싶다.




천재성에는 인종이 없고, 강인함에는 남녀가 없으며, 용기에는 한계가 없다.

나의 최애영화 <히드 피겨스>의 포스터에 나오는 말이다.

오늘의 사진에서 나는 흑인, 황인, 백인이 서로의 맞잡은 손과 손 사이에서 다이아몬드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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