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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이어깨동무 Jan 22. 2020

5. 모여서 꼭 평화를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by 파랑

2013년에 ‘어린이어깨동무’에서 '동아시아 어린이 평화워크숍' 모둠교사를 하면서 회원이 되었고, 2018년 9월에 어린이어깨동무에서 코리밀라로 파견하는 첫 번째 자원활동가가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은 어린이어깨동무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어린이어깨동무는 한반도가 더 이상 갈등과 분쟁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 남과 북의 어린이들이 서로 마음을 나누는 평화로운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북녘 어린이 지원, 평화교육문화활동, 남북어린이 교류사업 등을 전개하고 있는 단체다. 코리밀라는 북아일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평화단체로, 북아일랜드의 갈등 해결과 평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어린이어깨동무는 코리밀라를 서울로 초대하여 평화교육 심포지엄을 진행하였고, 자원활동가도 파견하는 등 교류활동을 하고 있다. 두 단체 모두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하고 있다.

코리밀라에서 2018년 9월부터 2019년 7월까지 자원활동가로 있으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쓴다.


POD: Peace on demand


어느 금요일 오후. 한가롭게 오전을 보내고 오후 5시 50분. 6시면 곧 저녁 식사 시간인데, 5시 30분까지 도착한다고 한 그룹이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주방에는 식사가 늦어질 것 같다고 이미 전했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따뜻한 차와 커피를 로비에 준비했는데, 이러면 도착하자마자 저녁을 먹을 것 같았다.  

5시 55분, 멀리서 버스 불빛이 깜빡였다. 비바람을 뚫고 커다란 짐가방을 든 30여 명의 청소년들이 버스에서 우르르 내렸다. 짐을 일단 로비에 놓고 저녁을 먼저 먹기로 했다. 학교와 집을 벗어나서 주말캠프를 온 아이들의 얼굴은 빛이 났다. 이렇게 POD: Peace on demand 캠프가 시작한다. 

POD: Peace on demand는 코리밀라와 BEAM 크리에이티브 네트워크, BNL 프로덕션, EU Peace IV programme이 함께하는 프로그램이다. 크로스 커뮤니티 프로젝트의 하나로 다른 배경의 학교에서 온 아이들이 보이는 팟캐스트를 만드는 프로젝트다. BEAM 크리에이티브 네트워크와 BNL 프로덕션에서 아이들이 팟캐스트를 만들 수 있게 도와주고, 코리밀라는 아이들과 평화교육과 팀워크 활동을 한다.  

POD에 오는 학교는 가톨릭 학교 하나, 개신교 학교 하나가 짝을 지어 온다. 내가 자원활동가로 같이 했던 POD 캠프는 두 학교가 이미 공유교육을 함께하면서 관계를 이미 맺었던 학교에서 같이 왔다. 아이들이 서로 얼굴만 아는 쑥스러운 사이였다. 함께 팟캐스트를 만들면서 Good relations(두 커뮤니티 간에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이 캠프의 목표다. 


다른 캠프의 시간표. 참가하는 아이들이 많은 캠프는 조별로 돌아가면서 다양한 활동을 한다.


활동 중 하나인 photo scavenger hunt에서  Rathlin(라슬린) 섬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오는 미션도 있다. 아이들은 라슬린 복도를 찍어올 때도 있다. 


단어 10개로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POD 캠프 내에서 코리밀라가 맡은 시간은 아이들과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다.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생각하는 것이 달라진다고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눈 이후였다. 나눠준 A4를 반으로 접고 자른다. 그리고 A4 반장에 다시 10개의 조각으로 자른다. 그리고 거기에 나를 나타내는 단어를 10개를 적는다. 이런 활동이 처음인 아이들은 생각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인턴이 자신의 단어 10개를 아이들에게 살짝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천천히 10개 중에서 자신에게 더 중요한 단어 7개를 고른다. 5개… 마지막에 3개만 남긴다. 아이들에게 공유하고 싶으면 친구들에게 자신의 단어를 이야기해달라고 했다. 

조별로 돌아가면서 활동을 하다 보니, 똑같은 활동을 진행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그때마다 나는 내 정체성을 나타내는 단어를 10개를 다시 썼다. 하루에도 여러 번 다른 단어를 적었다. 그리고 무엇이 더 나에게 중요한 단어인지 골랐다. 


한국인이고,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태어났고, 영어와 일본어를 할 수 있고, 종교가 없고, 읽는 것을 좋아하고… 


북아일랜드에 있다 보니 내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인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나의 중요한 정체성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밖으로 나가기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많은 것이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 누구에게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처음에 어려웠고, 어른들이 이야기할 때 편하게 앉아 있는 친구를 보고 놀라기도 했다. 나에게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북아일랜드에서 태어나서 자랐다는 것은 그 아이들에게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쓰고 남은 A4 반장에는 진행자가 들려준 단어를 듣자마자 떠오른 것 하나를 적는 활동을 했다. 공유하지 않을 테니 자유롭게 자신의 진짜 생각을 적으라고 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친구들과 공유하며 웃고 떠들던 아이들이 진행자가 단어를 계속 부르자 표정이 심각해졌다. 사회에서 여러 시선으로 바라보는 단어를 진행자는 이야기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가볍게 청소년, 교회, 트럼프 등으로 시작하던 것이 영국인, 아일랜드인, 개신교, 가톨릭, 무직, 노숙자, 성소수자 등의 단어를 이야기했다. 북아일랜드 밖에서 오고, 비종교인인 나는 교회, 가톨릭, 영국인 등의 단어에는 적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아이들은 어떤 말을 적고 있었을까. 


모여서 꼭 평화를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이들은 2박 3일 동안 대본을 쓰고, 촬영을 해서 10분 분량의 보이는 팟캐스트 작업을 끝냈다. 원테이크로 촬영을 하기 때문에 시작 이미지와 시작 음악을 넣는 것만 스태프들이 편집을 한다. 2일째 밤에 아이들은 파자마 차림과 준비해온 과자를 들고 라운지로 모인다. 다 같이 조별로 만든 팟캐스트를 보면서 부끄러워하고, 서로에 대한 평가도 한다. 아이들이 많이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영상을 보기 전에 함께 비명을 지르고 시작한다. 먼저 비명을 지르고, 영상을 볼 때는 부끄러워하지 말자는 의미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악, 영화, 화장법, 스포츠 등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한다. 기억 남는 주제 중 하나는 ‘파인애플 피자’에 대한 짧은 토론이었다. 마지막 날 아침에는 아이들이 짐을 싸고, 프로그램 평가를 한다. 마지막으로는 페이스북 생방송까지 마친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남은 코리밀라 스태프와 인턴, 자원활동가들이 캠프 평가회의를 한다. 

내가 처음으로 POD 캠프에 들어갔을 때 궁금했던 것은 팟캐스트 주제를 왜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악, 영화, 스포츠 등으로 한정할까였다. 나는 아이들이 자신들의 학교, 북아일랜드 사회, 갈등, 평화 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더 의미 깊은 팟캐스트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주제를 정하는 것도 스태프가 제시한 음악, 영화, 스포츠 등을 듣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골라서 그 안에서 아이들끼리 어떤 음악에 대해 이야기할지, 어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지 주제를 정한 것이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공유교육이나 학교, 북아일랜드 등의 주제를 제시한다면 더 좋은 ‘평화교육’ 프로그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이들이 북아일랜드 밖에서 온 사람들에게 북아일랜드의 장소를 한 번 소개하는 주제는 어떨까? 공유교육에 대해서 직접 이야기한다면? 청소년들이 느끼는 북아일랜드 사회 내의 갈등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평가회의에서 이야기했다.  


코리밀라가 있는 밸리카슬. 누군가가 지도에서 'northern'이라는 말을 지우고 아일랜드만 남겨놓았다. 


평가회의에서 나온 대답은 아이들이 과연 편안하게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을까였다. 물론 아이들이 북아일랜드 갈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서로 많은 것을 알게 될 수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중학교 2학년 나이의 아이들이 같이 2박 3일의 캠프를 한 사이에서 자신의 진솔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까? 서로가 상대방 커뮤니티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상대방이 서로의 역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역사’가 무엇인지 ‘갈등’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까. ‘나’를 돌아봐도 한국 사회의 갈등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꼭 모여서 평화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아이들이 만나서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보고, ‘나와 다르지 않은’ 친구들이 이야기하면서, 서로 좋아하는 공통점을 찾고 그것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으로 충분했다. 이미 거기서 ‘작은’ 변화는 시작되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변화를 계속 만들어가는 것은 어른과 사회의 책임도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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