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대중교통으로는 최소 2시간, 차로는 1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밸리카슬 마을이 있다. 마을에서 30분 정도 걸어야 코리밀라가 나온다. 버스가 저녁에 끊겨 벨파스트에서 저녁을 먹으면, 밸리카슬로 돌아오기 힘들다. 그래서 자원활동가 프로그램으로 버스를 빌려서 일 년에 한두 번씩 벨파스트로 나갈 때마다 도시로 나간다는 생각에 들뜬다. 자원활동가의 구성과 담당자에 따라 교육 프로그램이 다른데, 내가 있을 때는 벨파스트에 2번, 데리/런던데리 1번을 다 함께 갔다. 스타벅스에 가서 ‘아이스’ 라떼를 먹고, 아시안 슈퍼마켓에도 들리겠다는 부푼 마음을 안고 간다. (북아일랜드도 아이스커피를 파는 곳이 드물다)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겠다는 희망을 안고 가지만, 단체로 벨파스트에 가는 것은 북아일랜드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첫 벨파스트 나들이에서는 자원활동가가 네 그룹으로 각각 벨파스트 동쪽, 서쪽, 남쪽, 북쪽에서부터 걸어서 중심에 있는 벨파스트 시청까지 찾아오기로 했다. 오면서 봤으면 하는 중요 지점도 미리 지도에 그려서 나눠줬다. 오면서 어떤 국기가 걸려 있는지, 보도블록의 색깔은 어떤지, 어떤 벽화가 그려져 있는지 등을 보면서 오라고 이야기했다.
내가 간 곳은 동벨파스트 (East Belfast)였다. 동벨파스트는 개신교가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었는데, 유니언잭을 자랑스럽게 내걸고 있는 건물들이 보였다. 건물 벽화에서도 오렌지공 윌리엄 3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코리밀라로 돌아와서 동서남북에서 찍어온 벨파스트의 모습을 함께 봤다. 친구들이 찍어온 서벨파스트 (West Belfast)에는 아일랜드 국기가 있는 곳이 보였다. 벨파스트의 어느 부분인지에 따라서 도시가 이야기하는 ‘우리’가 달랐다.
다른 벨파스트 나들이에서는 Peace wall이나 북아일랜드 갈등 시기에서 평화의 목소리를 외쳤던 곳들을 버스로 돌아다니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도시가 품고 있는 갈등의 흔적을 돌아다니면서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벨파스트를 보여주던 코리밀라 사람들은 우리가 이 나뉜 도시에서 어떤 것을 느끼기를 바랐을까.
한 아일랜드 신문에서 만든 인터렉티브 지도. 북아일랜드의 개신교와 가톨릭이 주로 어디에 사는지 인터렉티브 지도에 담았다.
코리밀라에 가기 전부터 어린이어깨동무 행사에서 이것저것 북아일랜드에 대해서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자원활동가로 가기로 결정 난 후부터는 우리말로 된 논문이나 기사를 살펴보면서 공부하려고 했다. 코리밀라로 도착하고 나서 처음 받은 자원활동가 교육에서도 북아일랜드 갈등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했다. 우리말로 어느 정도 공부하고 갔으니,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몇 가지 문제가 생겼다.
첫 번째는 내가 서울에서 우리말로 읽고 간 것을 영어로 들으면서 그 둘을 연결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말로 아는 이야기를 영어로 들으면 이해하지 못했고, 영어로 듣고 대~~ 충 이해한 부분이 내가 미리 공부한 부분인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두 번째는 북아일랜드의 갈등을 이야기하려면 아일랜드 역사 초기부터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일랜드 역사를 듣기 시작했는데, 공부해야 하는 줄 몰랐던 부분이었다. 북아일랜드 갈등 문제는 결국 아일랜드와 영국의 역사부터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는 이름과 약어였다. 주변 사람들 이름들도 제대로 못 외우고 있는데, 역사에 나온 인물 이름을 어떻게 한 번에 듣고 알 수 있겠는가. 정당이나 단체는 약어로 많이 이야기하는데, 이야기를 듣다 보면 누가 누군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영어 이름 발음을 듣고 다시 자료를 찾아보려면 한참을 헤매곤 했다.
9월 한 달은 열정이 넘쳐서 밤에 혼자 라운지에 앉아 다시 자료를 찾아보곤 했다. 지나가는 친구들한테 아까 낮에 이런이런 이름의 사람을 언급한 것 같은데, 철자를 어떻게 쓰는지 물어보면서.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다 이해할 수 없으니, 종종 나머지 공부를 하곤 했다.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것은 포기했다. 대신에 알아들은 것을 바탕으로 상상하기 시작했다. 북아일랜드의 상황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다면? 만약 우리가 남과 북이 다 함께 산다면 어떻게 될까?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을 보다가 맘에 드 부분이 있다면 내가 서울로 돌아가서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생각했다. 누가 북아일랜드의 문화가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갈등에 대해서 쉽게 이야기할 수도 없고, 누군가 이야기를 꺼내도 다른 사람은 말을 쉽게 하지 못한다고 했다. 서로 바라보는 역사가 다르고 받은 상처가 달라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두렵고, 자신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아픔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 생각해봤다.
혼자 벨파스트에 가서 퀸즈대학교 연구소에서 하는 공개 학술 행사(1969: The outbreak of the troubles in Nothern Ireland)에 간 적이 있다. 북아일랜드에서 1969년부터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행사였다. 폭력의 피해자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거나,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모아 연구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들려줬다. BBC북아일랜드에서 제작하고 있는 다큐멘터리도 잠깐 볼 수 있었다. 60년대에 태어난 PD가 자신과 일하고 있는 새로운 PD들이, 아니면 자신의 자녀인 젊은 세대들이 불과 몇십 년 전의 일을 모르고, 갈등을 잘 모른다는 것이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 중 하나라고 했다. 마지막 질의응답 시간에 누군가가 강연을 마친 연구자에게 질문을 했다.
당신은 누구한테 이야기를 들었죠? (누구라고 대답하자) 그 사람은 그 자리에 없었어요. 저는 그날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저와 함께 있던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질문을 하던 사람은 잘못된 사실을 이야기로 만들고 있다며 마이크를 사양하며 계속 이야기를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과거를 어떻게 배웠는지 의문이 들었다.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과거를 배웠나? 우리 사회에서도 다양한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나는 그것을 ‘사실’로 배웠나? 과거에서 하는 이야기를 나는 과연 제대로 알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