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으로 만나는 남과 북 3
피스레터는 어린이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서 정기적으로 발행하는 잡지입니다. 우리 사회가, 우리 역사가 놓치고 있는 평화적 가치를 발견하여 글로 쓰고, 함께 읽고 소통하는 실천을 통해 평화적 가치와 담론을 공유하고, 우리의 평화를 함께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피스레터 다시 읽기>에서는 피스레터에 기고되었던 글을 다시 소개합니다. 피스레터는 어린이어깨동무 홈페이지(www.okfriend.org)나 평화교육센터 블로그(https://peacecenter.tistory.co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음식으로 만나는 남과 북]
박정배 음식칼럼니스트
차가운 국물에 면을 말아먹는 음식문화는 한국을 제외하고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국물을 좋아하는 한민족의 음식 문화와 온돌의 뜨거움과 여름 더위를 견디기 위해 찬 육수에 국수를 말아먹는 냉면이 탄생한 것이다. 2018년은 몇 차례 남북정상회담으로 뜨거웠고 차가운 냉면은 주연급 조연으로 한민족은 물론 전 세계인의 이목을 받았다. 서울의 냉면집들도 덩달아 문전성시를 이뤘다. 최근 들어 북한 이탈 주민들의 냉면집 창업도 이어지고 있다. 평양의 냉면 문화는 건재하고 서울의 냉면 문화는 세련되고 다양화되었다. 평양냉면에 견줄 실체가 서울냉면으로 구축되었다.
한민족 최초의 냉면 기록은 조선 중기의 문인 장유(張維, 1587~1638)의 문집인 『계곡집』(谿谷集, 1643)에 실린 「자줏빛 육수에 냉면을 말아먹고」(紫漿冷麵)라는 시에 처음 등장한다. 정약용은 「장난 삼아 서흥 도호부사 임군 성운에게 주다(贈瑞興都護林君性運), 그때 수안 군수와 함께 해주(海州)에 와서 고시관(考試官)을 하고 돌아갔음」(1797년)이라는 긴 제목의 시에 '시월 들어 서관에 한 자 되게 눈 쌓이면, 이중 휘장 폭신한 담요로 손님을 잡아두고는, 갓 모양의 냄비에 노루고기전골 하고, 무김치 냉면에다 송채무침 곁들인다네'라는 시에서 평안도의 냉면 풍정(風情)을 적었다. 1849년에 써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세시풍속집인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에는 '메밀국수를 무김치, 배추김치 국물에 말고 돼지고기와 섞은 것을 냉면이라 한다. 또 여러 가지 채소, 배, 밤, 쇠고기, 돼지고기 썬 것, 기름, 간장을 국수와 섞어 비빈 것을 ‘골동면’이라 부른다. 관서지방의 냉면이 가장 맛이 있다.'라고 적고 있다. 관서(關西)는 평안도 지역을 말한다. 지역은 물론 내용에서도 여기 언급한 냉면은 분명 평양식을 지칭한다.
19세기 말 평양냉면집에 관한 기록은 김구(金九, 1876~1949) 선생의 『백범일지』에도 등장한다. '밤에는 대동문 옆에 가서 면을 먹었다. 처음에는 주점 주인이 주는 대로 소면(素麵)을 먹다가 나중에는 육면(肉麵)을 그대로 먹었다. '(『백범일지』 1899년 5월) 19세기 말에 평양 대동문 주변에 냉면집들이 제법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19세기 후반의 평양 모습을 그린 회화식 지도인 기성전도(箕城全圖)에는 대동문 옆 동포루(東砲樓) 앞에 '냉면가(冷麵家)'가 표시되어 있다. 지금 옥류관과 그리 멀지 않은 대동강변 성 안쪽이다. '평양냉면은 특히 평양의 명물인 바 부민식료(府民食料)중 제일 중요한 부분을 점령하였으니 ‘평양냉면’이라는 것은 사시 1년을 공통으로 식용한다. 그에 따라서 연산액(年産額)도 상당하니 실로 50만 원에 달한다.'(동아일보, 1926년 9월 11일 자)
1936년판 <평양상공명록>에 등재된 평양냉면집들은 16곳이다. 1940년판 <평양상공명록>에는 평양조선인면옥조합의 회원이 60명으로 나온다. 1937년 8월 1일 자 『동아일보』에는 당시 평양부 내에 “80여 냉면업자는 일제히 냉장고를 사용하도록 엄달할 터이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평양상업조사(1939년)에는 평양의 전체 음식점 578개 가운데 냉면집이 127개로 22%를 차지하는데 단일 업종으로는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24년 9월 1일 자 <개벽> 잡지에는 ‘평남은 냉면국’이란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해방 이전에 평양냉면에 관한 기사는 제법 등장한다. '냉면이란 어디 것 어디 것 합니다마는 평양냉면같이 고명한 것이 없습니다. 이곳 냉면은 첫째, 국수가 좋고 둘째, 고기가 많고 셋째, 양념을 잘합니다. 게다가 분량조차 많고 값조차 눅은싼데야 더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동아일보, 1926년 8월 21일, 「평양인상, 요리비판 평양냉면」)
'겨울에 평양냉면이라면 얼른 동치미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니 아랫목에 이불을 쓰고 앉아 덜덜 떨면서 동치미 국물에 냉면을 먹는 맛은 도저히 다른 데서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무슨 특별히 담그는 법이 있는 것은 아니오. 평양은 물이 좋고 웬일인지 다른 지방보다 무 맛이 다른 데다가 일기가 차가우니까 한번 익은 맛이 변하지를 아니하므로 그 맛이 그대로 보존되어 씩씩한 맛을 잃지 않는 것뿐입니다.' (동아일보, 1926년 8월 21일)
분단 전의 기사를 보면 평양냉면은 순메밀면에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육수나 겨울에는 주로 동치미 국물을 사용했다. 하지만 분단 이후의 냉면에 대한 기록은 1960년 옥류관 건설 이전에는 찾기 힘들다. 이후 북한에서 옥류관은 '민족 료리의 원종장(原種場)'(로동신문, 2011년 2월 4일 자)으로 평양냉면은 '인민이 사랑하는 민족 음식'이 된다. 평양냉면이 평양과 북한을 대표하는 음식이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오랜 전통을 지닌 음식이었다. 둘째는 김일성과 김정일 위원장의 냉면 사랑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1995년 9월 21일 자 로동신문에 실린 '고유한 민족 음식 평양랭면'이란 기사에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는 최근에도 어버이 수령님(김일성)께서 생전에 평양랭면은 순메밀 가루로 만들어야 제 맛이 난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시였다고 하시면서 그것이 바로 평양랭면의 특징이며 자랑이라고 가르치시었다. (중략) 고유한 민족 음식인 평양랭면은 메밀 껍질을 지내(너무 지나치게) 벗기지 말아야 구수한 메밀 냄새가 잘 풍기며 육수물도 시원하게 잘 만들어야 고유한 맛을 살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먹을 때에도 식초를 국수 발에 친 다음 그것을 육수 물에 말아야 고유한 제 맛이 난다.' 당과 수령, 인민이 사랑하는 평양냉면의 지위는 평양냉면이 단순한 음식을 넘어섰음을 말해준다. 때문에 평양냉면은 남북정상회담의 상수가 되었다. 평양냉면은 해방 이전과 고난의 행군이라 불린 1990년대 중반까지는 닭고기, 돼지고기, 쇠고기 국물을 섞은 육수와 동치미를 사용하고 면발은 메밀을 주로 사용했지만 고난의 행군과 김정일 위원장의 감자 권장 정책에 의해 메밀에 감자나 고구마 전분이 섞인 냉면이 일반화되었다.
서울냉면의 시작을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보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19세기에 여러 기록이 등장할 정도로 서울의 냉면 역사는 오래되었고 평양과는 별도로 시작되었다. 18세기 무렵의 한양은 상업의 발달과 얼음과 쇠고기, 돼지고기가 일반화되어 냉면 문화의 바탕을 갖추고 있었다. 유만공(柳晩恭, 1793~?)이 서울의 풍속을 기록한 『세시풍요』(歲時風謠, 1843)라는 시집에도 냉면이 등장한다. '냉면집과 탕반(湯飯), 장국밥집이 길가에서 권세를 잡고 있어, 다투어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마치 권세가 문전처럼 벅적인다.'라고 적고 있다. 냉면하면 고종 임금이 유명하지만 순조 임금의 이야기도 있다. 조선 말기의 문신 이유원(李裕元, 1814~88)이 중국과 조선의 사물에 관해 기록한 『임하필기』(林下筆記, 1871), 「춘명일사」(春明逸史)편에는 순조 임금의 냉면 이야기가 나온다.
‘초년(1800년)에 한가로운 밤이면 순묘(純廟), 순조는 매번 군직(軍職)과 선전관(宣傳官)들을 불러 함께 달을 감상하곤 하셨다. 어느 날 밤 군직에게 명하여 문틈으로 면(麵)을 사 오게 하며 이르기를, “너희들과 함께 냉면을 먹고 싶다” 하셨다. 한 사람이 스스로 돼지고기를 사 가지고 왔으므로 임금이 어디에 쓰려고 샀느냐고 묻자, 냉면에 넣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는데, 상은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으셨다. 냉면을 나누어줄 때 돼지고기를 산 자만은 제쳐두고 주지 않으며 이르기를, “그는 따로 먹을 물건이 있을 것이다” 하셨다. 이 일은 측근 시신(侍臣)이 자못 본보기로 삼을 만한 일이다.’
19세기 말 왕실과 관청에 그릇을 납품하던 지규식(池圭植, 1851~?)이 20년간 쓴 『하재일기』(荷齋日記, 1891~1911)에도 1895년 4월 12일, 20일, 24일 연이어 냉면을 먹은 기록이 있다. 19세기 말엽 냉면은 서울에서 매우 보편적인 외식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도 서울에는 무교동의 ‘혜천옥’, 관철동의 ‘평양루’ 등이 유명했다. 하지만 6.25 전쟁 이후 북한 실향민들이 대거 서울에 정착하면서부터 서울의 평양냉면집들은 평양에서 온 냉면 본가에게 맛에서 밀리고, 실향민들의 모임 장소로서도 북한 출신 냉면집이 문전성시를 이루면서 몰락하게 된다. 대한민국에 평양냉면이 다시 번성하게 된 것은 1972년 8월 30일에 이루어진 남북적십자 본 회담을 전후로 신문과 방송이 북한 관련 기사를 봇물처럼 쏟아내면서부터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실향민이 아닌 대한민국 출신의 셰프들이 냉면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새로운 시도가 성공하면서 오랫동안 이어온 실향민 중심의 평양냉면 문화는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다. 평양의 평양냉면이 식량난과 민족 음식의 정체성이란 기준의 한계에 봉착한 것과 달리 서울의 평양냉면은 여러 가지 냉면 문화가 공존하는 속에서 새로운 발상들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 육수의 전통인 양지육수를 기본으로 해방 이후 정착한 실향민 냉면에, 최근에 북한을 이탈한 주민들의 요즘 북한식 냉면까지 서울의 냉면은 다양하다. 최근 들어 메밀을 몇 가지 섞는 면발에 투플러스 쇠고기로 만든 국물과 꾸미를 장착한 완전히 새로운 미식 냉면이 연착륙하면서 이제는 서울냉면이라는 선언을 해도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 조성되었다. 평양 사람 서울냉면 먹고, 서울 사람 평양냉면 먹는 날이 어서 오는 즐거운 상상으로 더운 여름을 이기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