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으로 만나는 남과 북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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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으로 만나는 남과 북]
박정배 음식칼럼니스트
남북이 북한에서 만날 때면 평양냉면이 언제나 화제에 오른다. 중국의 면(麵) 요리를 한국인은 국수로 부른다. 국수란 단어의 최초 기록도 동의보감(東醫寶鑑) 탕액편(湯液編)에 '국슈(麵)'으로 나온다. 면(麵)은 중국에서는 밀가루로 만든 면을 총칭하지만 한국에서는 밀가루, 메밀가루 등 모든 면을 총칭하고 국수도 마찬가지다. 서정범 교수는 한민족 고유어 '국'은 물이 중심인 음식을 말한다고 했고 '수'도 물의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서정범 교수에 의하면 국수는 국물 음식이란 뜻이 된다. 평양 사람들은 평양냉면을 국수라 부른다. 평양의 국수가 유명해지면서 평양의 찬 국수는 평양냉면이 되었다.
함경도 분들도 자신들의 면 음식을 국수라 불렀다. 타지방 국수와의 차별이 필요한 순간이 되자 국수 앞에 정체성을 내세울 기호가 생겨났다. 평안도와 달리 함경도는 감자와 고구마가 많이 났던 탓에 이를 가루로 만들어 농마국수라 부르기 시작했다. 농마는 감자나 고구마를 걸러낸 가루인 녹말의 함경도 사투리지만 일반적으로 감자녹말을 칭한다. 북한에서는 함흥냉면이란 말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문헌만으로 추적하면 함흥냉면은 남한에서 함경도 실향민들이 만든 단어라고 추정된다. 미군 병사 클리포드 L. 스트로버스(Strovers, Clifford L)는 1953년 11월부터 1954년 11월까지 미 공병부대원으로 근무하면서 부산을 사진에 담았다. 1954년 부산 국제시장을 찍은 사진 중에는 ‘함흥냉면옥’을 찍은 사진이 있다. 함경도식 냉면집답게 간판 아래 ‘회국수’란 글자도 선명하다. 1954년에 찍은 국제시장 ‘함흥냉면옥’을 비롯해 신창동 '고려정냉면', 시청 옆 '평양서부면옥', 동아극장 옆 '황금냉면옥', 동광동 '광락냉면'같이 냉면은 어느 특정한 지역이 아니라 부산의 전 지역에서 고르게 발견된다.
함흥냉면은 함경도 사람들의 안부와 정체성을 확인하는 음식이었고 냉면집은 만남의 장소였다. 남한에 최초의 함흥냉면집은 함경도와 가장 가까운 속초에서 전쟁 중에 시작되었다. 1951년에 함경도 실향민들이 가장 많이 모여들었던 속초에 함흥냉면 집이 최초로 세워졌고 함경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던 서울의 청계천 평화시장과 중부시장 오장동에 1954년부터 함흥냉면집들이 들어섰다. 함흥냉면은 함경도의 농마국수, 감자농마국수가 대한민국 사회에 정착하면서 생긴 변형된 음식 체계인 것이다. 남한 사회에 함경도식 냉면의 정착기는 평양냉면보다 험난한 과정을 겪는다. 평양냉면은 오래전부터 남한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음식이었지만 농마국수는 생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농마국수의 주성분인 감자 전분은 메밀로 만든 평양냉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질기다. 거기에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함경도 음식의 특징과 가자미식해 같은 생선 꾸미가 올려지는 것도 다르다. 남한 사람들은 이런 음식 체계를 이상하게 여겼다. 특히 전쟁과 이후의 부산에는 감자 전분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남한 사람들의 식성과 재료 부족은 새로운 대안을 찾아내게 된다. 당시 부산 구포국수가 유명했다. 전쟁과 이후에 미군에 의한 밀가루 공급이 확대되면서 밀가루로 만든 마른 국수인 구포국수는 부산 시민과 실향민들을 먹여 살렸다.
이후 함흥에서 내려와 함흥냉면을 팔던 사람들은 남한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고구마 전분과 밀가루를 섞어 면을 만들었다. 실향민이 몰려 살던 우암동 입구에는 함경도 흥남 내호 출신 실향민이 세운 '내호냉면'이 들어서고 당감동에는 본정냉면, 함흥회냉면같은 식당이 장사를 시작한다. 당시 부산사람들은 우동이나 소면 같은 밀가루 국수 문화에 익숙해 있었다. 다수를 차지하던 부산 토박이 손님들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내호냉면은 창업 후부터 북한 실향민에게는 회국수 같은 함경도식 냉면을, 부산 토박이들에게는 국수를 팔았다. 몇 년간의 냉면과 국수의 동거를 끝낼 새로운 면이 1959년에 내호냉면에서 만들어진다. 밀가루 70%와 고구마 전분 30%를 섞은 밀냉면이 탄생하자 실향민들과 부산 토박이들 모두가 좋아한다. 당시에는 밀냉면, 경상도 냉면, 부산 냉면이라 불렀다.
1960년대 중반부터 정부 정책에 인해 맞이한 밀가루 음식의 전성기와 때를 같이하여, 1966년 개금 시장 입구에 세워진 ‘개금밀면’이, 1970년대 초반 가야2동 동의대입구역에서 언덕이 시작되는 부근에 있는 ‘가야밀면’이 문을 열면서 밀면의 대중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00% 밀가루를 이용한 부드럽고 단 맛이 나는 면과, 새콤달콤한 양념과 한약재를 넣어 시원하고 담백하며 몸에도 좋은 육수로 만든 가야밀면에 대중들은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밀면이 함경도 사람들을 넘어 부산 사람들의 음식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함흥냉면보다 부드러워진 면발의 변화와 더불어 가야식의 달달한 한약재 육수, 개금식의 개운한 닭고기육수가 완성된 뒤의 일이었다. 면과 육수가 부산의 재료와 풍토, 사람들의 입맛을 완벽하게 반영하면서 밀면은 비로소 완전한 정체성을 가지고 발전과 분화를 시작했다. 밀면은 한반도 현대사가 낳은 한민족의 음식이다. 북한 분들이 자신들이 낳은 음식의 남한식 변형과 탄생을 마음껏 맛볼 그날을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