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에 ‘어린이어깨동무’에서 '동아시아 어린이 평화워크샵' 모둠교사를 하면서 회원이 되었고, 2018년 9월에 어린이어깨동무에서 코리밀라로 파견하는 첫 번째 자원활동가가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은 어린이어깨동무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어린이어깨동무는 한반도가 더 이상 갈등과 분쟁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 남과 북의 어린이들이 서로 마음을 나누는 평화로운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북녘 어린이 지원, 평화교육문화활동, 남북어린이 교류사업 등을 전개하고 있는 단체다. 코리밀라는 북아일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평화단체로, 북아일랜드의 갈등 해결과 평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어린이어깨동무는 코리밀라를 서울로 초대하여 평화교육 심포지엄을 진행하였고, 자원활동가도 파견하는 등 교류활동을 하고 있다. 두 단체 모두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하고 있다.
코리밀라에서 2018년 9월부터 2019년 7월까지 자원활동가로 있으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쓴다.
코리밀라의 시작
런던으로부터 1시간 30분가량 비행기를 타고 가면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 도착한다. 벨파스트에서 다시 차로 1시간을 달리면 밸리카슬이라는 바닷가 마을이 있다. 해변과 라슬린 섬(Rathlin Island)과 자이언트 코즈웨이 등이 있어 북아일랜드 내에서는 나름 유명한 휴양지이기도 하다. 밸리카슬 바닷가 끝에 코리밀라 센터가 있다.
코리밀라는 1965년 목사 레이 데이비(Ray Davey)가 만들었다. 2차 세계대전 시기에 YMCA에 있던 레이 데이비는 전쟁에 참여하였고, 독일군에 포로로 잡혀 드레스덴 포로수용소에 있었다. 연합군이 드레스덴을 폭격하면서 수용소에서 풀려나올 수 있었다. 포로수용소에서 경험을 통해 레이는 갈등의 파괴성과 공동체를 만드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이후 벨파스트에 있는 퀸즈대학교의 목사가 된 레이는 학생들과 갈등이 심해지고 있던 북아일랜드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공동체를 설립하고 싶었다. 레이와 학생은 돈을 모아 7천 파운드에 1965년에 밸리카슬에 오래된 별장을 샀고 코리밀라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Troubles라고 북아일랜드 분쟁의 시기는 흔히 1968년부터 1998년으로 정의된다. 1921년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가 분단되면서 북아일랜드 내에서 가톨릭 계를 향한 차별은 계속 있었다. 폭력적인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1968년을 분쟁의 시작으로 정의하는 경우가 많다. 1965년에 설립된 코리밀라는 분파주의로 갈등이 얼룩진 북아일랜드에서 상처 받은 사회를 회복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는 평화 단체가 되었다.
학생들과 레이는 손수 건물을 수리해가면 열린 공동체를 만들었다. 직접 침대를 만들었고, 센터를 방문한 사람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설립 초기부터 활동한 학생들은 코리밀라를 공동 소유하는 커뮤니티 멤버가 되었고, 학생들이 자원봉사로 센터에 와서 일을 하던 것은 지금 전 세계에서 자원봉사자가 와서 코리밀라에 함께하게 되었다.
벨파스트 퀸즈 대학교
9월 9일 한자리에 모이다
설립 초기부터 자원봉사는 코리밀라의 중요한 활동 중 하나였다. 일 년 동안 여기서 배운 경험을 가지고 돌아가서 분단된 북아일랜드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마을을 바꿔나갈 수 있도록 자원활동가들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지금은 월요일에 자원활동가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는 자리를 만든다. 지금은 북아일랜드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자원활동가가 온다. 인터넷에서 코리밀라의 이야기를 듣고 온 사람, 어릴 적 코리밀라를 방문한 추억으로 온 사람, 미국에서 코리밀라에 왔다가 다시 자원활동가로 온 사람, 코리밀라의 기독교적 가치를 공부하기 위해 온 사람, 코리밀라와 교류하고 있는 외국 단체에서 온 사람 등 많은 사람이 자원봉사자 비자로 코리밀라에 온다. 보통 1년 활동가 12명, 3-6개월 활동가 3명, 그리고 3개월 이하 단기 자원활동가들이 코리밀라에서 함께 일한다.
2018년 9월 9일 나와 함께했던 2018-2019 자원활동가들이 모였다. 각자 다른 이유로 코리밀라에서 일 년을 보내기로 선택하였다. 처음 도착해서 벨파스트에 있을 때는 그렇게 떨리지 않았는데, 도착할 시간이 되자 점차 떨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섰고, 먼저 도착한 자원활동가들과 일을 시작한 인턴, 인근에 살고 있던 커뮤니티 멤버가 나를 반겨 주었다. 다행이었던 것은 2017년 어린이어깨동무 초대로 한국에 방문했던 이본느 네일러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본느는 커뮤니티 멤버로 흔쾌히 나의 제2의 호스트 패밀리가 되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오기 전에 얼굴을 미리 익히면 좋겠다고 알렉스는 나와 9시간의 시차를 극복하고 한국에서 미리 스카이프로 화상통화를 했다. 아는 얼굴이 그나마 2명이나 있었다.
짐을 방으로 올려놓고, 거실로 다시 내려왔다. 소파와 의자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자리로 들어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미국에서 온 룸메이트와 인사했다. 함께 모인 1년 자원활동가는 가족과 같은 존재다. 1년 동안 함께 살다 보니 내 인생의 한 꼭지를 차지한 사람들이 되었다. 한국으로 오기 전에 휴가를 받아 런던으로 방문했다. 룸메이트한테 마지막 선물을 주고 싶어 런던의 한 서점에서 에코백을 샀다. 룸메이트한테 기억에 남을 만한 선물을 하고 싶어서였다. 룸메이트는 이런 선물 없이도 내가 인생의 한 페이지에 있는 기억에 남을 만한 사람이라고 했다. 일 년을 함께 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가끔씩 힘들 때면 침대에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룸메이트가 그립다.
코리밀라는 센터에 오는 사람을 위해 환영 포스터를 붙인다. 새로운 자원활동가를 환영하기 위한 포스터.
월요일 저녁 함께 식사하는 식구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항상 센터는 바쁘게 돌아간다. 일요일 2시에 그 주의 마지막 그룹이 떠나고 뒷마무리를 하면, 그날 저녁부터 월요일까지는 센터가 잠깐 숨을 돌린다. 일요일 저녁에는 여유롭게 쉬면서 본관 주방에 남아있는 음식을 꺼내 먹는다. 월요일 오전에는 자원활동가들과 스태프들이 모여서 전체 회의를 하고 그 주를 준비한다. 월요일 오후는 자원활동가들이 공부하는 시간이다. 스태프나 커뮤니티 멤버를 초대해서 여러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월요일 저녁은 커뮤니티 디너로 자원활동가들이 함께 식사하는 자리다. 화요일부터 일요일은 각자의 스케줄에 맞춰서 정해진 일을 한다. 그러다 보니 같은 집에서 살아도 얼굴을 못 보는 경우도 종종 있다. 월요일 저녁은 자원활동가들의 기숙사에 모여서 직접 만든 식사를 한다.
자원활동가는 대부분 전 세계에서 모인 청춘들. 한 명이 자원활동가들에게 자신이 만들어주고 싶은 요리를 한다. 미국, 독일, 스웨덴 등에서 모인 친구들이 자신이 만들고 싶은 요리를 한다. 코리밀라식 마카로니 파스타를 먹은 이탈리아 친구가 이건 파스타가 아니라며 기겁하며 이탈리아 정통 까르보나라를 만들어 대접한 적도 있었다. 나도 우리 음식을 알리고자 여러 번 커뮤니티 디너를 만들었다. 20대의 내가 요리를 해봤자 해도 어디서 한 번에 25인분 요리를 해봤겠는가? 다들 원래 저녁 시간을 넘기고 10분 후면 완성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인터넷 레시피를 보면서 재료를 준비했는데 항상 채소의 삼분의 일은 쓰지도 못하고 남았고 준비한 음식의 삼분의 일은 냉장고로 가서 그 주의 소중한 양식이 되었다.. 가장 호평을 받았던 것은 감자전(북아일랜드에서도 감자를 굉장히 많이 먹는다)과 아시안 마트에서 사 온 카레로 만든 카레라이스였다.
한 번은 자원활동가들이 다 같이 MT를 떠난 적이 있다. 거기서 공동체와 가족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했다. 나는 우리말로 가족을 '식구'라고 하기도 한다고 소개해줬다.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이 가족이라고. 친구들은 그 말을 굉장히 맘에 들어했다. 일 년 동안 함께 만든 밥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면서 인생의 한 부분에 기억 남는 사람들이 되었다.
어느 햇살 좋은 날, 다 함께 풀밭에서 파티를 했다
지금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일 년 동안 코리밀라에 있으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한 가지가 있다. 어린이어깨동무에서 북아일랜드 연수를 오면서 코리밀라를 방문했다. 나는 그룹을 돕는 자원활동가로 들어갔다. 어린이어깨동무에서는 코리밀라에서의 일정이 끝나고 나서 하루 함께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데리/런던데리의 통합학교를 방문하고, 저녁에는 한식을 먹고 김동진 박사님의 책 발간 행사를 하는 일정이었다. 여기서 문제는 그룹이 가고 난 후에 청소를 내가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장 벨파스트에서 잘 수 있는 곳을 찾는 것도 문제였다. 어깨동무가 방문한 동안 행사가 끝나고 밸리카슬로 돌아올 사람을 찾았지만, 아쉽게도 없었다.
늦은 밤, 침대에 누운 룸메이트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학교와 벨파스트에 가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가고 싶지만 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룸메이트는 나에게 물어봤다.
"그게 네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야?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들이야? 가치가 있는 일이라면 어떻게든 벨파스트로 가. 방법은 있을 거야. 내가 너의 일을 대신 해줄게."
나는 내가 해야 하는 일과 어떻게 돌아올지를 먼저 고민하느라 그 일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할지 고민을 하고 있지 못했다. 벨파스트로 가는 것은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룸메이트는 내일 아침에 한 번 자원활동가 담당자에게 이야기를 꺼내보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그룹이 떠나기 한 시간 전 이야기를 꺼냈다. 알렉스는 나에게 이야기했다.
지금 빨리 가서 가방을 싸.
"나는 다른 자원활동가들이 너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게 청소를 부탁할게. 그리고 나는 지금부터 내가 아는 벨파스트에 사는 사람에게 전화를 할게. 네가 하룻밤 묵을 수 있는 곳을 찾아볼 거야. 만약 아무 곳에도 찾지 못한다면, 네가 대중교통으로 올 수 있는 곳까지 내가 데리러 갈게. 너의 마음이 그 일을 하고 싶다면 지금 빨리 가서 가방을 싸."
현실에서 해야 하는 것을 고민하느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고민하지 못했었다. 안될 거야 생각하고 지레짐작 일을 포기한 적도 많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지도 못한 채 흘려보낸 적이 많았다. 낯선 환경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서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하면서 배운 것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