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차 유라시아 대륙횡단 준비에 부쳐-한희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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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무등일보 기사를 공유해 봅니다.
기사를 감당해 주신 이용규 신문제작국장님은 전남일보에서 편집국장을 역임하셨고, 현재는 무등일보에서 그 역량과 재능을 이어가고 계십니다.
신문 구독자로서, 전남일보에서 국장님이 재직하시던 시절 지면 디자인과 홈페이지 운영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글과 그림은 한희원 작가(님)가 맡아 주셨습니다.
한희원 작가(님)는 화가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을 아시는 분들은 하나같이 그림에서 느껴지는 깊이가 시에서도 그대로 느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칠순이 넘기셨지만 저는 형님으로 인사드리고 있습니다.
저와 아주 오래된 사이도, 같은 업종도, 매일 만나는 사이도 아니지만 만나 뵐 때마다 형님은 노인이 아닌 청년으로 보입니다.
청년 같은 형님이 후배들을 아우르고 사회에서 어른 역할까지 해주신다면, 정말 멋진 분 아니실까요!
한희원 작가님은 고 한경직 목사님의 조카이기도 합니다.
공인에 대한 평가는 바라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지만 ‘호지민 아저씨’를 좋아합니다.
현재, 교회에서는 사랑이라는 말이 난무하지만 세상은 ‘교회에는 사랑이 없어’라고 말합니다.
한편 사회주의적 시선을 가진 사람들은 평등을 외치지만 이미 세상은 알고 있습니다. 사회주의는 새로운 계급의 탄생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역사와 성경은 말합니다.
나로부터의 변화 없는 모든 외적 변화는 새로운 모순의 시작이라고.
그것은 결국 선동일뿐입니다.
**서울에서 7일째
서울에서 머문 지 7일째입니다.
이동루트에 따라 주로 세 곳의 숙박시설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은사님이 살고 계시던 강변역 부근,
다른 한 곳은 시청 등과 가까운 동묘 부근,
마지막은 국회와 인접한 영등포 부근입니다.
서류 작업은 대학가 주변의 풍부한 인프라 시설을 활용하며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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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청년, 제냐
2014년 세 번째 유라시아 대륙횡단을 마치고 육로로 다시 돌아온 블라디보스토크 호스텔에서 한 청년을 만났습니다.
‘예브게니’, 러시아에서는 친해지면 애칭을 사용합니다. ‘예브게니’는 ‘제냐‘라고 부릅니다.
지방에 살고 있다고 말하자, 자신이 서울에서 알고 있는 숙소를 소개해 주겠다며 스마트폰으로 구글 지도를 펼쳐 보여 주던 제냐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당시 그는 모스크바에서 북쪽으로 267Km 떨어져 있는 야로슬라블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기찻길로 9288km이니, 그는 거의 1만 Km를 이동해 온 셈입니다. 그에게는 같은 러시아 땅이라고 해도 블라디보스토크는 ‘외국 같은 곳’이었을 것이고, 다른 나라지만 ‘1만 Km 거리’라는 점에서 서울 역시 그에게는 비슷한 감각의 공간이었을 겁니다.
2014년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점령했습니다. 해석은 보는 시선이 따라 다르지만, 당시 서방세계는 러시아에 대해 경제 제재를 가했습니다. 이로 인해 제냐는 자신이 개발한 책상보조용품 판매 계획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바꾸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블라디보스토크 호스텔에서 만난 제냐는 책상디자이너라고 자신을 소개했었습니다. 나이는 당시 27세.
새로운 영업 전략에 따라 1만 Km를 이동해블라디보스토크를 베이스캠프로 정하고 호스텔 숙소에 머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만든 책상 보조용품은 스마트폰과 적당한 거리를 두도록 도와주는 기능이 있었고,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어린이 집과 초등학교를 타깃으로 삼아 판매를 시작힜습니다.
메일로 카탈로그를 보내고, 초대받으면 샘플을 들고 찾아가는 방식이었습니다.
한편 “이케아”라는 글로벌 회사가 가구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개개인에 대해 제공하는 가상의 무료 영업공간을 활용해서 전 세계를 상대로 영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프라인에서는 틈틈이 한국·일본·중국을 오가며 1만 여 Km의 공간을 파악해 가면서 새로운 시장 개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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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에게 오늘 밤 어디에서 잘 것인가는 현실적이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게 저는 러시아인 제냐에게서 서울의 저렴하면서도 청결한 숙박업소를 소개받았습니다.
지금은 디지털 기반의 세계화 시대입니다.
스마트폰 하나로 국경을 넘나들며 ‘지구를 캔버스 삼아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는’ 디지털 유목민들이 활발합니다.
이러한 개인들이 모이면 한 국가의 경쟁력이 되는 시대입니다.
현재 지구촌의 신진 리더들은 종종 스티브 잡스처럼 ‘차고에서 시작한 인물들’과 비유되곤 합니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제가 주로 이용하는 찜질방에는, 수능을 마치고 자유를 얻은 학생들,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 그리고 외국인들이 많습니다.
이들 중에는 저와 같은 탐험가도, 제냐 같은 외국인도, 그리고 ‘K’라는 이니셜을 빛낼 미래의 글로벌 스타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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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차 대륙횡단 준비
현재 저는 제7차 대륙횡단과 관련해서 러시아 정부로부터의 훈장 수여를 목표로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그동안의 반복된 유라시아 대륙횡단 행위를 통해 러시아에서 만들어진 네트워크를 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현지 언론사 두 곳의 주요 임원들이 제 활동의 취지를 이해하고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조언을 받아 국내에서 훈장수여를 위한 추천서를 받고 있습니다.
제7차 대륙횡단은 “분단된 남과 북의 길을 연결하자(DMZ메시지)”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국제정치의 주요 무대인 뉴욕에서 그리고 도쿄, 서울, 모스크바, 베를린, 헤이그, 파리 등지에서 이슈화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대륙을 횡단하고, 태평양을 건너 일본에서, 서울에서, 시베리아를 지나 모스크바와 베를린, 헤이그와 파리에서 그리고 북동항로(북극해항로)를 따라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한 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반도 DMZ를 통해 서울에 이르고자 하는 여정입니다.
이 계획에 포힘 되어 있는 ‘북동항로’와 ‘한반도 DMZ’ 관련해서 모두 러시아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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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 인정되지 않는 일을 ‘직업’으로 살아온 시간
지금까지의 대륙횡단은 대부분 자비로 감당해 왔습니다. 이에 따른 수입은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부산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암스테르담에 이르는 유아시아 대륙횡단 도로에 대해 기록하고 반복적으로 자료화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국가가 해야 할 일을 개인이 대신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하기도 했습니다.
정식 직업군에 존재하지 않는 이 일을 선택하며
사람들의 시선에서 소외되고, 때론 조롱도, 약탈도 감당해야 했지만 현재 저는 제가 하는 일을 ‘프로’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소실점을 저 멀리로 잡고 망망대해와 같은 환경에서 점을 찍고 그 점들을 연결해 가면서 선을 만들고, 그 선이 형태를 이루는 과정을 통해 많은 배움들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이가 먹어서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니고, 청년 같은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어른이 아닌 것도 아닙니다.
저 역시 청년 같지만 어른이 되는 꿈을 가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