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나들이 기록을 시작하며
대학 시절 추억이니 아주 오래전 일이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학군단(ROTC)에 입단을 하고 캠퍼스 생활의 절반을 학생과 장교후보생이라는 두 가지 신분으로 살았다. ROTC 학생은 여름 방학에 한 달씩 병영 훈련을 하게 된다. 대학생의 여름 방학이 군사 훈련이라니... 아아아... 이 디자인 전공의 자유로운 영혼에게는 정말 힘든 일이었다.
3학년 여름 방학 훈련 도중 각개전투 훈련 시간이었다. 각개전투란 전장에서 이동하는 기술을 배우는 시간이다. 직립 보행을 포기하고 주로 땅을 기어 다니는 것이 대부분이다. 앞으로 기고 뒤로 기고... 우리는 이것을 포복이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남자들에게는 아주 친근한 추억 소환 용어가 되겠다. 혹시 땅에 엎어져서 흙을 눈 바로 앞에 놓고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흙과 눈의 간격이 10cm 이내로 말이다. 흔치 않을 것이라 믿는다. 훈련 도중 가뿐 숨을 내쉬며 땀범벅이 되어 앞팀이 기어 나가기를 기다리며 땅에 엎어져 있었다.
그 순간 눈앞에 햇빛을 받아 영롱이는 흙들의 다채로운 색과 열롱함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보석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 훈련받으면서도 디자인과 대학생 티 내는 순간이었다. 그 아름다운 발견은 잠깐씩 훈련의 피로를 잊게 했다. 황홀한 '흙 보석'에 취한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이 훈련을 마치고 나가면, 내가 갈 수 있는 제일 먼 곳으로 가야겠어! 그것이 이 고생을 하고 있는 나에 대한 보상이고 선물이야..."
그 순간이 나와 제주가 연결되는 첫 순간이었다. 한 달 훈련을 마치고 나오니 방학이 조금 남아 있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대학생들의 방학은 길디 길다. 흙에 얼굴을 파묻고 내게 약속했던 다짐을 실천해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지금이라면,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이 남미 아르헨티나나 아프리카 정도가 되겠지만, 그 시절에는 아쉽게도 일반 국민은 해외로 나갈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도대체 말이 되나 싶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이해가 안 되면 그냥 외우면 되는 시절이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내가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곳은 제주였다.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그곳이 가장 먼 곳이었다. 그때 제주는 지금처럼 인스타 찍으로 뻔질나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일생에 한번 신혼여행에나 갈 수 있는 머나먼 곳이었다. 그 멋진 곳을 나를 위해 선물하겠다는 생각으로 난생처음 비행기란 걸 타고 배낭을 메고 제주로 떠났다.
육지 촌놈이 제주 공항에 내려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공항에 나무가... 열대 지역 화보에서나 보던 그런 나무가 있다. 엄청 컸다. 여기가 우리나라 맞나?... 신기했다. 그리고 세화 해수욕장의 비치빛 바다 색은 하와이에 와 있는 듯한 황홀감 그 자체였다. 그 충격적인 첫 경험 이후 살아오면서 제주를 뻔질나게 다녔다. 휴가로, 출장으로, 엠티로, 여행으로... 제주가 좋았던 나는 2016년 가을에는 한 달간 제주를 돌며 소위 '한달살이'도 했다. 이제는 제주 어느 지역명만 들어도 위치와 풍경 등 마치 내 동네처럼 눈앞에 훤하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우리나라에 제주가 없었다면...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슬픈 현대사의 결과로 반도에 허리 잘린 우리는 정말 끝단에 있다. 터미널이다. 더 갈 곳이 없다. 그나마 남쪽으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갈 수 있는 숨 트인 곳이 제주다. 제주 없는 대한민국은 생각만 해도 답답하기 그지없고 여백 없는 공간이 된다. 제주가 있어 대한민국은 완전체가 된다. 그래서 생각한다. 제주는 우리에게 내린 정말 큰 선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