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같은 명절, 나는 무기를 갖춘다.
그렇다. 추석 명절이 다가온다.
결혼 전 명절은 나에게 연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집에 먹을 게 많아지는 날이었고 일하는 데 한손 거들면 “어휴 얘는 착하네 시집가기 전부터 이런 걸 하고, 넌 이쁨받겠다.”란 소리를 듣던,
근데 그것도 썩 나쁘지 않은 인생일 거라고 생각하던
그냥 그런 일이었다, 금방 지나가는.
결혼 후 첫 명절이 떠오른다. 8월 말에 결혼한 우리가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 단 이틀만에 추석연휴가 시작되었다. 그간 결혼을 준비하며 갔던 남편 집에서 나는 ‘예쁜 며느리’, ‘고마운 며느리’, ‘딸처럼 나를 닮고, 어쩜 종교도 같은 며느리’로서 ‘귀한 손님’ 대접을 제대로 받고 있었는데,
명절날 가니 같은 곳의 완벽히 다른 공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제, 남편 집안의 차례를 위해 숨넘어가게 전을 부쳐야 하는 하녀였고, 남자들이 식사를 끝낼 때까지 부엌에서 꼬르륵거리는 배를 쥐어잡고 기다려야 하는 하등 시민이었으며, 정작 차례가 진행될 땐 내가 참여를 하든 말든 차례 진행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할 그림자가 되어있었다. 그 낯선 공기에 황망해하면서도, 첫 명절을 테스트처럼 잘 치러내고 싶었던 나는 긴장된 상태에서도 한번이라도 더 웃으려, 재미있는 농담 한마디라도 더 건네려 주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무척 힘든 경험이었다.
한 번 그렇게 명절을 보내고 나니 이리도 나의 신분을 완전히 달라지게 만든 원인, ‘결혼’을 문제삼게 됐다. 결혼하자 마자, 결혼을 후회하게 된 것이다. 결혼 자체도 망설이게 했던 나의 우려- 즉 결혼하면 가부장제라는 블랙홀 속으로 어쩔 수 없이 빨려들어갈 거라는 두려움이 극대화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단지 ‘남편의 배우자, 동반자’의 삶을 선택한 것만이 아니라 ‘그 집안의 며느리’라는, 사위와 비교해 매우 역할이 분명한 존재로 앞으로 어떻게든 기능할 거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참 느리다. 항상 그랬다. 요샌 결혼 전 미리 그런 상황을 예상해 안전망을 만들고 현명하게 대처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말이다. 어쩌면 내겐 이런 경향이 좀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로부터 사랑받는다는 생각이 들면 이성적인 판단에 앞서 그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는 경향. 내 부모와 달리 남편의 부모에게서 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무조건적인 사랑, 그 사랑에 보답하고 싶은 효녀의 마음이 먹구름처럼 내 안에 드리워졌던 것이고, 결국 정작 중요한 나를 미리 보호하지 못했다.
그렇게 몇 번의 명절과 제사를 겪는 동안, 나는 때마다 남편과 과격하게 다투었고, 여러 네이버 카페들에 나의 고민을 담은 글을 썼고, 팟캐스트 ‘네여자들’ 멤버와도 이슈 토크를 거듭하며 고민을 이어왔다. 처음 명절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후 울 엄마에게 전화했을 때 그녀가 했던 말, “어차피 다 무뎌질거야.” 때문에라도, 더 긴 시간이 흐르기 전에 나는 스스로에게 떳떳해져야 했다.
결혼 후 세번째 명절이었던 작년 추석, 생각지도 못하게 변화는 이루어졌다. 고민했던 시간이 무색하게도, 이성적이고 계획적인 방식이 되지는 못했다.
추석 전전날, 나와 남편은 명절에 관련한 문제로 이제 태어난 지 갓 백일이 지난 아가를 사이에 낀 채 서로 밀치고, 내가 아이를 데려가겠다며 소리 소리를 질러댔다. 겨우 내가 아이를 데리고 나올 수 있게 된 건 습도계를 남편 얼굴에 던져 그의 안경을 깨트린 후였는데, 아기띠를 하고 동네를 배회하다보니, 지나가는 차소리며 자전거 경적 소리에 아기가 깜짝 깜짝 자지러지듯 놀랐다. 그 때의 참혹한 기분이란. 대체 명절이 뭣이관대, 라며 모두 명절 탓을 하고 싶었다. 아니 명절 탓이었다.
다행히 우리는 신혼부부, 화해도 빨랐다. 그날 밤 바로 화해를 하고 남편은 ‘내일 가기 싫으면 가지 마’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정말 아무런 계획도 준비도 없이, 에라 모르겠다. 하고 시댁에 가지 않았다.
시댁은 우리 집에서 걸어서 오분 거리에 있다. 아이를 낳고 친정보다는 30분이나마 직주근접성을 가진 남편 동네에 자리를 잡았다. 육아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때도 받고 있었고, 지금도 받고 있다. 명절이라는 특정한 시공간을 겪기가 싫었을 뿐이지, 남편의 부모님은 그 선한 성정으로 하여금 존경을 불러일으키는 분들이다. 하물며 육아에 도움받기까지, 그런데도 명절에 불참한다는 게 어찌나 대역죄인이 된 기분이 들었는지 모른다. 육아에 도움받는 것, 명절을 지내는 것, 남편과 내가 아이와 행복하게 사는 것은 모두 우선순위가 다른 독립된 명제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며느리의 일이 되면, 그 모든 것은 눈치봐야 마땅한 일이 되어 두루뭉술해진다. 나 역시 그 땐 그렇게 잔뜩 움츠러들어있었다. 명절에 예고 없이 찾아가지 않은 나의 행동은, 이 동네로 이사왔음에도 불구하고 육아를 부탁드릴 수 없을 상황, 그간 평온했던 고부지간을 완전히 깨트릴 것을 각오한 것이었다.
남편이 시댁에 가서 나 대신 시부모님과 앞으로 명절문화를 어떻게 바꿀지에 대해 얘기하기로 했기에, 나는 동네에서, 한마디로 시댁 근처에서 아기를 유아차에 태우고 배회하고 있었다. 답답하고 불안했지만, 그저 지금와서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으로 만들 수도 없어 붕 떠있는 기분이었다. 그 때 산책하는 작은 아버지와 아가씨(남편의 사촌동생)가 보였다. 데이트를 하듯 즐거운 얼굴로 가벼이 걷는 그들과, 유아차를 밀며 허둥지둥 도망가는 나. 아 명절이란 건 남자와 여자에게, 기혼자와 미혼자에게 어떻게 이리도 다른 것일까. 나 하나 때문에 시댁이 발칵 뒤집혔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그들은 그들만의 명절을 즐기고 있었다.
이제 밤 10시가 지났다. 내 얘기를 대신 전하겠다던 남편은 돌아오지도, 전화를 받지도 않고 있다. 남편은 내가 직접 나서면 고부관계가 돌이킬 수 없어질까봐 먼저 조율하겠다고 했지만, 그 시간쯤 되니 뭔가 용기가 생겼다. 나는 나의 입장과 생각을 조곤 조곤 시댁 어르신들께 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바닥은 쳤을 거고, 그것보단 나은 상황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잠든 아기를 유아차에 태우고 시댁에 도착하니 시어머니의 눈물로 얼룩진 술판이 벌려져 있었다. 남편은 하루 종일 내 생각을 전하려 애를 썼던 것 같긴 하지만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어떻게 니가! 하물며 내가 지금 니 애를 봐주고 있잖냐!” 그동안 나를 얼마나 아끼셨는지 사랑했는지, 그래서 얼마나 배신감을 느끼는지 표현하시느라 어머님은 많이 우셨다. 그제서야, 우리가 어떻게 갓난애를 사이에 놓고 싸워야 했는지, 왜 나의 생각을 지우고 그저 일년에 하루 이틀 희생할 수가 없었는지 우는 어머님의 손을 잡고 구구절절이 나도 말씀드렸다. 한참을 그렇게 이야기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버님은 애초에 명절에 오든 안오든 니들 맘대로 하라는 주의셨던 것 같고, 내가 없어 어머님과 단 둘이 주방 일을 맡으셔야 했을 작은 어머님께서는 “우리 집안에 이런 주제를 들고 와줘서 고마워. 우리는 생각하지 마. 너랑, 니 애만 생각해.”라고 말씀해주셨다. (나로서는 가장 예상치 못한 지지였다. 부엌일에서 내가 빠지면 가장 피해를 본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분이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추석 아침. 딱히 내가 올 거라 기대하지 않았을, 아니 내가 불편해서라도 맞고싶지 않았을 시댁에 나는 갔다. 뜻밖에 어젯밤 일은 꺼내어지지 않은 채로 차례를 드리고 식사를 마쳤다. 뒷정리와 설겆이는 이전부터 남편과 얘기한 바가 있어 남편이 전담했다. 첫 명절 이후 그는 쭉 그래왔다. 어른들이 말리거나 말거나, 먼 친척의 제사이거나 말거나 자신이 혼자 맡았다. 자기 아니면 또 다른 어느 며느리가 하게 될 테니.
나는 식사도 웃으며 마치고는 넉살좋게 시아버지, 작은아버지와 고스톱을 쳤다. 처음 같이 벌이는 판이어서 그랬나 운도 붙었다. 그렇게 시끌벅적했던 지난 추석이 지나갔고 한 일주일 후였나, 어머님은 우리에게 “안그래도 내가 먼저 언젠가는 너희들 명절 꼭 오지 않아도 된다고 풀어주려고 했었다. 생각보다 일찍 너희가 그런 방식으로 얘기하게 돼서, 우리가 마치 고지식한 사람 되는 것 같아서 불쾌하지만, 설날은 우리집에 오고 추석엔 친정 가거라. 아니, 친정이라는 말도 왜 비하하는 의미라고들 한다지? 앞으로는 아이에게도 자영동집, 문장동집이라고 부르자꾸나.” 하셨다.
한바탕의 소란 이후, 아마도 소란을 피우지 않아도 됐을 시부모님이었기에 결국 이런 결과를 맞이한 것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리도 원했던 명절문화 바꾸기에 있어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명절을 한 번은 아내 집, 한 번은 남편 집에 먼저 갈 수 있게 되었고, 제수 준비도 음식 차림과 정리도 여자 남자가 같이 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어른들은 아니고, 남편이 앞서서 움직이니 남편보다 나이가 어린 남자들이 함께해주었다.
어쩌면 이 정도의 변화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다. 겨우 이 정도를 위해서, 내 가족도 아닌 남편의 가족들 사이에서 튀어나올 필요가 있냐고. 혹은 사람 대 사람으로 상대방의 방식을 그만큼이나 존중하지 않아야 할 필요가 있냐고.
첫째도 둘째도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어쩌면 내가 진정 원한 것은 단순히 내가 ‘착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기대를 무너뜨리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결혼이라는 형식으로 남편과 결합했지만, 그것이 가부장제 전부를 받아들이겠다는 건 아니라고, 선을 그어놓고 싶었던 것 같다. 더욱이 명절은 진실로 고되었고 슬펐다. 몇백년을 대대 손손 내려온다는 이 조상들의 발자취에서, 딸이 기리는 엄마, 그 엄마의 엄마들은 모조리 사라져있다는 사실이 슬펐다. 어딜 가도, 내가 내 손으로 직접 엄마를 기리고 외할머니를 기리는 제사는 없었다. 그건 어느 한 집단의 다른 집단에 대한 폭력이라 느꼈다.
나의 본가, 즉 친정도 조금은 바뀌었다. ‘추석전전날 기제사-추석 당일 차례’로 3~4일 간 이어지던 제사 러쉬를 기제사 한 번으로 줄이기로 했다. 한마디로 추석을 없애버리셨다. 내가 시댁 추석을 지내지 않고 우리집에 오겠다고 하자 내리신 결정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추석 차례를 줄인 것은 그간의 세월동안 몇박 며칠을 제사준비하느라 힘들었던 것이 진짜 이유지 내가 변화의 요인이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렇게 결혼 후 다섯 번째 추석을 맞게 됐다. 명절과의 전쟁에서 무기를 하나 하나 늘려가는 느낌이다. 나에게는 ‘선택권’과, ‘미움받을 것이 두렵지 않은 마음’이라는 두가지 무기가 생겼다. 그러니 이번은, 무사히 내상 없이 지나가면 좋겠다. 여전히, 이 또한 지나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