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결혼이라는 블랙홀 속에 깊숙이 빠져들어온 나.
시작은 서른 한 살이 시작되던 겨울, 용인의 한 심리상담소로 거슬러 올라간다.
4년 여를 준비한 시험에서 연거푸 떨어지며 숨을 못 쉬어 기절하는 일이 벌어졌던 나는,
끊임없이 겨울만 지속되는 것 같은 20대에 막 마침표를 찍고 있었다.
"나오세요. 집을 나오세요."
자애로운 분위기의 선생님은 (그게 당신의 페르소나: 가면이라 하셨다.) 읊조리듯 나긋하게 말씀하셨지만
그 분의 말은 내게 힘이 셌다. 보증금 몇백만원도 없으면서 당장 집을 구하기 시작했고,
운이 좋게도 경복궁역 근처의 한 셰어하우스에 내 방을 얻었다.
'아, 이게 삶이구나. 이렇게 행복한 거구나.'
'아, 이게 나라는 사람이구나. 내 안에 이렇게 많은 노래가 숨어있었지.'
몇 발짝 내려가면 '윤동주하숙집'이 자리하고, 또 몇 발 올라가면 수성동계곡 소리가 들리는
인왕산 자락에서, 그렇게 나는 다시 태어났다.
기존에 나의 일상을 채우며 연락하던 사람들, 특히 가족을 만나는 일은 너무나 버거웠다.
그럼에도 그즈음 소개팅을 했던 한 남자분은 계속 만나졌다. 나의 상황과 감정을 얘기하는 게
이상하게 그의 앞에서는 부끄럽지 않았다. 또 그는 내가 나의 미래나 복잡한 마음 등 시시콜콜한 얘기를 할 때에
"당신은 무엇이든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안해도 멋지지만요."
라고 매우 일관되게 이야기해주었다. 안경 너머에서 미소짓는 그의 눈이 생경하리만치 아름다웠다.
셰어하우스 시절을 지나 조금의 보증금을 모아 월세방에 들어갔고, 그렇게 일 년 남짓 연애하는 동안
나의 세상이 많이 재건되었다.
항상 외로웠던 나에게 월세방에 초대할 친구들이 생겼다.
보증금이 금방 모일 정도로 하는 일에서 자리를 잡았다.
대학시절 꿈이었던 마을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되었다.
내가 만든 노래를, 사람들 앞에서 공연하게 되었다.
그 외 부수적인 사건이 있었다면 이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준비하던 시험에서 꽤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기까지 했다. 한 일년 남짓에 이 정도의 변화라니 한 사람의 인생에선 빅뱅이 아니었겠는가. 이 시기의 행복을, 나는 '독립'이라는 완전무결한 상태에서 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길래 네가 이런 곳에서 살아야 하니."라며 울던 엄마 앞에서도,
엄마가 데리고 온 이모들 앞에서도. 나는 부끄러운 것이 없었다.
나라는 인간이 삶을 지속하기 위해 매일 마셔야 하는 물,
그 물을 내가 끓여 머리맡에 두는 것이 좋았고
내가 꾸며 놓은 서너평 남짓의 작은 방이 좋았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향이라 항상 간접등을 켜놓았는데
밖에서 만두 트럭의 스피커 소리, 오토바이 소리 등이 정겹게 엉겨들어오면
어두워도 무섭지 않았다.
"엄마, 엄마에게 나는, 주머니 속의 조그만 딸이겠지만
엄마, 나에게 나는, 혼자서도 잘 하는 강인한 여성이예요."
그 시절 만들어불렀던 노래 가사였는데
그만큼 나는 엄마에게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한 아픔이 컸던 모양이다.
독립의 시간, 나는 스스로 그 아픔을 보듬었고, 언제까지고 나는 이렇게 스스로를 돌보아야 하는 존재라고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내 인생 최대의 급변기를, 나는 소개팅으로 만나 잘 알지도 못하던 사람과 함께했다.
함께 있으면 모든 게 수월해지던 사람. 그가 있기에 이 모든 것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나를 놓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커져가고 있었나보다.
그러다 청혼을 받았고, 기뻤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주인공이 된 느낌이었다.
이 사람이 맞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이 사람 외에 내가 예상치도 못한 변수들이 나를 훼방놓을 것만 같았다.
결혼이라는 이름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어가, 어렵사리 찾은 행복이 끝나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는 말했다.
"아니야, 결혼은 블랙홀이 아니야. 두 소행성이 손을 맞잡고 자유롭게 은하계를 뛰노는 거야."
지금 생각하면 매우 비현실적인 이 말이, 당시엔 나의 심장을 녹일 듯했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식장 문 앞에 서기 전까지 "나 못할 것 같아."하며 울었던 나.
결혼이 불러올 삶의 변화가 세상 끝날 듯 두려웠지만 그럼에도 그 문을 열고 발걸음을 뗀 건
용인의 심리상담사 선생님께서 해주신 이 말 때문이었다.
"결혼은, 완전한 독립이예요."
지금의 독립도 이렇게 좋은데,
결혼을 통해 더 큰 독립을 이룰 가능성이 있다고?
첫 만남 이후 내 인생에서 적지 않은 지분을 획득해버리신 상담선생님의 말을 기억하며
나는 결혼이라는 산을 올라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이제 결혼 생활 4년차.
자기주장이 강한 두돌배기 아이 하나가 있고,
매우 한결같아서 때로는 싫고 때로는 좋은 남편이 있다.
아이 낳은 지 한 달만에 복귀해서 일을 열심히 하고 있으며
원하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 꿈의 언저리에서 내 일거리를 늘려가며 행복을 찾고있다. 평범한 행복 속의 나날.
그러나 ‘서는 곳이 달라지면 보이는 것도 달라진다.’고 했던가,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했던가.
한 때 나라는 사람은 절대 일반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어우러지기 위해 스스로를 끼워맞추면 안되겠다고 다짐했었다. 내 나약함이 그것들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고립의 시간이 무색하게도,
며느리로, 딸로, 아내로, 엄마로 사는 동안
옥인동 골목길에서 바람을 맞으며
스스로의 행복을 찾던 나는
어느 새 멀리 있는 듯하다.
다시 그를 만나고 싶어
이렇게 브런치를 시작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