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째 폭염이 기승이다. 7월의 밤이 더운 건 12월의 겨울이 추운 것처럼 당연한 거다. 다행히 선풍기를 틀어 놓으면 잘 만하다. 에어컨이 없던 시절 어떻게 더위를 견뎠나 싶다. 운동장 수돗가에서 콸콸 쏟아지는 수돗물에 시도 때도 없이 머리를 감았고, 야자 시간에 대야에 찬물을 받아 발을 담그기도 했다. 그런 시절도 있었다. 난 지금 에어컨을 켜고 의자를 젖힌 채 쾌적하게 글을 쓴다. 여름밤이 시원할 수 있다니...이건 당연한 게 아니다. 감사해야 할 일이다.
아이가 커 가면서 생각이 커지고 표현이 다양해지고 감정의 진폭도 커져간다. 좋을 때는 이상한 춤을 추며 웃음을 터뜨리게 하지만, 싫을 땐 짜증 가득한 견디기 힘든 음역대로 소리를 지른다. 좋은 부모가 되자고 항상 생각하지만 이 더위에 아이의 짜증을 듣는 건 열대야보다 힘들다. 좋은 소리가 나갈 리 없다. 학교에서도 잘 안 쓰는 호통을 단전에서 끌어올린다. 그런데 너무 갑자기 힘을 썼는지 삑사리가 났다. 아내가 먼저 터져버렸고 아이는 어리둥절하다 깔깔댄다. 학교가 아니라 다행이다.
아이를 어른의 관점에서 보면 지적할 것들 투성이다. 식사 시간에 돌아다니며 아주 오랫동안 밥을 먹는다. 종이에 그림을 그리다 책상 위에 낙서를 한다. 결정적으로 치울 줄 모른다. 이해가 안 가는 것들 투성이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니 아내가 나에게 지능적으로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고 물어본다. 하,,,너까지 왜 그러니,,,아내의 궁금증이 진심이 아니길 바랐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다. 아이는 아이다. 서툴고 실수하는 게 당연하다. 당연한 걸 짜증으로 받아 버리니 아이는 위축된다. 가만, 이건 자연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부정당하는 거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부모에게 문제가 있다, 나는 학교에서 누군가에게 쓴소리를 하고 싶을 때 그냥 참는다. 그리고 내가 그런 소리를 할 자격이 있는지 돌이켜 본다. 학교에서,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에게는 그렇게 조심하면서 귀한 내 자식에게는 왜 조심하지 않는가?
아이를 재울 때 항상 기도를 해 준다. 안전, 건강, 행복하란 말을 항상 한다. 오늘 안전한 곳에서 건강히 놀았는데 아빠가 화를 내서 행복하지 않았을까봐 걱정이 된다. 생각을 바꾸자. “짜증 소리가 우렁차구나. 어디 가서 기죽고 살진 않겠다.”, “책상에 낙서를 했구나. 요즘엔 벽에 낙서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도 있더라. 뱅크시 알지?” 종일 쫓아다니며 귀찮게 굴었던 오늘을 난 분명히 그리워할 것이다. 그때 더 잘해줄걸 하는 후회를 분명 할 것이다. 그러니 내일은 나무라고 다그치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