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커피

by 호방자

어렸을 때 외할머니는 나와 동생을 위해 거의 매일 우리집에 오셨다. 버스를 두 번, 총 네 번을 갈아타야 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할머니는 가끔씩 믹스커피를 타 드셨고 어린 나에게 그 달큼한 향은 참 매력적이었다. 어린 나는 따뜻한 커피를 마시니 마음이 따뜻해진다며 어린애답지 않은 말을 하였고 그 말에 할머니는 웃으셨다. 할머니는 지금도 가끔씩 그때 이야기를 하신다.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으신가 보다. 내 유년의 따뜻했던 기억이다. 그때 그 커피가 태어나 처음으로 마신 커피일 것이다.



정말 사나운 여름이다. 등줄기로 흐르는 땀에 감각이 집중된다. 길을 걷다 저절로 시원한 카페에 눈이 돌아간다. 대학 때 새로 생긴 카페에서 커피를 시켰다. 아무것도 몰랐기에 메뉴만 보고 특이한 이름의 에스프레소를 시켰다. 점원이 날 의아하게 쳐다봤던 게 기억난다. 받아든 커피는 엄지손가락만 한 잔에 담겨 있었다. 백조는 늘 하얗다고 믿던 나에게 검은 백조가 나타난 순간이었다. 한 모금을 홀짝하고 더 이상 마시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종종 하곤 한다. 그 때 그 맛을 잊을 수 없다고. 어렸을 적 어머니가 해주던 음식, 고생하던 때 위로가 되었던 음식, 행복했던 순간을 함께했던 음식.


고향에 돌아와 공부하며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다.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카페. 고시촌의 다른 저렴한 커피집보다 500원이나 비싼 곳이었다. 하지만 사장님이 드러내는 품질에 대한 자신감은 나같은 문외한의 맹목적인 신뢰를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아메리카노 한 잔에 2천원, 말 그대로 2천원의 행복이었다. 500원을 더하면 사치스러운 라떼를 마실 수 있었고, 거기서 5백원을 더하면 호사스러운 바닐라라떼를 마실 수 있었다. 물론 500원을 더 내는 데는 500원 이상의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다. 10번의 인고 끝에 찾아오는 쿠폰 찬스와 지금까지 잘 살아왔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친구 찬스도 기억이 난다.



커피를 마시기로 마음먹으면 발걸음부터 가볍다. 하지만 주문 직전까지 갈등한다. 아메리카노? 라떼? 인생 뭐 있어? 바닐라라떼를 좋아했다. 자꾸 경험해야 알게 된다. 자꾸 마셔보니 알겠더라. 우유가 너무 많이 들어가면 안 된다. 한 모금 넘긴 후 커피의 쌉싸름한 맛과 향이 남아야 한다. 얼음이 너무 많아도 안 된다. 얼음이 다 녹으면 맛의 조화가 깨진다. 한 여름엔 열람실로 가져와 마신다. 대신 열람실 안에선 조용히 마셔야 한다. 구석에 처박혀 한 모금을 마시고 혀에서부터 온 몸으로 전해지는 그 황홀함을 즐긴다. 그 표정과 몸짓이 물론 별로겠지만 괜찮다. 열람실 구석에서 아무도 날 못 본다는 짜릿함도 느낄 수 있다. 욕심은 화를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알고도 잘못을 저지르는 게 인간이다.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마시려 빨아들이는 순간 적막했던 열람실은 내 존재감으로 가득찬다. 이럴 거면 그렇게 숨 죽이며 마실 필요가 있었나 싶다. 그 작은 용기에서 어쩜 그리 큰 소리가 나는지 서운할 지경이다.



출근하면 하는 일이 있다. 도착하여 가방을 벗어던지고 중앙 탁자로 튕겨져 나간다. 그리고 커피를 준비한다. 포트에 물을 올리고, 원두를 갈고, 거름종이를 접고, 뜨거운 물을 원두에 한 번 적셔준다. 적당히 초를 세고 원을 그리며 물줄기를 떨어뜨린다.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처음 나오는 진한 커피는 라떼로 만들어 먹기 적당하다. 커피는 칼슘을 빠져나가게 하므로 우유를 곁들인다. 교무실에 넘치는 우유를 소진시키려는 목적도 있다. 깔끔한 아메리카노도 좋다. 그렇게 커피를 내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 자리로 온다. 그제야 가방을 열고 노트북을 꺼낸다. 쿨하다. 멋지다. 뒤이어 오는 선생님들이 맛있게 드시기를 바랄 뿐이다.



퇴근 시간이 되면 모두들 분주해진다. 1분이라도 늦으면 괜히 손해보는 느낌이신가 보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인사를 나누며 나도 퇴근 준비를 한다. 설거지를 한다는 뜻이다. 아침에 가득했던 커피는 바닥이 보인다. 커피가 남아있는 날은 서운하기까지 하다. 고맙다는 인사는 추호도 바라지 않지만 안 드셨을 때의 서운함은 뭘까. 탁자에는 컵과 그릇이 널브러져 있다. 아무도 설거지하지 않는다. 가끔 미안하다며 다음엔 자기가 하겠다는 말을 하신다. 그걸로 됐다. 커피를 내리고 뒤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난 설거지할 때도 뒤돌아보지 않는다. 이 때도 좀 멋있는 것 같다.



얼마 전에 할머니께 커피 믹스를 큰 걸로 사다 드렸다. 할머니에게 몸에 안 좋으니 먹지 말라고 하지만 할머니는 신경쓰지 않고 드신다. 쿨하시다. 내가 할머니를 닮았나 보다. 그럼 설탕을 줄이라고 하지만 역시 듣지 않으신다. 달아야 맛있단다. 오래 살아야 될 거 아니냐 하니 몸에 좋은 것만 먹으면 저승갈 때 힘겹다고 하신다. 눈물이 핑 돈다. 인도네시아에 145세 드신 할아버지가 담배를 퍽퍽 피우며 걸어다니신다고 한다. 우리 할머니도 커피를 벌컥벌컥 드시며 오래오래 걸어다니시길 바란다.



커피를 좋아하고 자주 마시다 보니 궁금했다. 언제 처음 마셨고,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었는지. 얼마 되지 않는 나의 삶에 하나의 음료가 궤를 같이 하고 있음에 알 수 없는 위로가 되었다. 커피를 안 드시는 분인데도 교무실에 가득한 커피향에 기분 좋아하시는 걸 보았다. 비 오는 날이면 유난히 커피향이 좋다. 코 끝을 살살 간지럽게 하고, 정신을 몽글몽글하게 만드는, 씩씩거리며 들어와도 기분을 누그러뜨려 주는 이 마음 따뜻해지는 음료를 계속 즐길 수 있었으면 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