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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단상 21. 피에 새겨진 기억은 없다

- 문화와 정체성에 대한 단상 -

by 여철기 글쓰기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을 보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혈귀 중에서도 끔직한 기억이, 주인공이 새로운 기술을 깨닫게 되는 과정에서도 '피의 새겨진 기억'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였다. 애니메이션이니까 그럴 수 있지. 극적인 연출을 위한 장치니까. 그런데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정말 무언가를 '피'로 물려받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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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나무위키https://namu.wiki/w/%ED%95%B4%EC%9D%98%20%ED%98%B8%ED%9D%A1


민족성이나 문화적 정체성이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는 오래된 질문이다. 만약 내가 일본에서 태어났다면?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그래도 나는 한국을 좋아했을까? 솔직히 말하면, 아마도 아니었을 것 같다. 태어난 곳의 언어로 생각하고, 그곳의 음식을 먹고 자랐다면, 나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테니까.


이건 불편한 진실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문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가치관, 심지어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정체성조차도 상당 부분은 환경이 만든 것이다. DNA에 각인된 게 아니라, 자라온 세월과 경험이 쌓아올린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전통'이라고 부르는 것들, '우리 문화'라고 자랑스러워하는 것들은 과연 무엇일까?


최근 제사 얘기가 나올 때마다 고민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제사를, 우리는 '문화'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면 '악습'이라고 불러야 할까? 명절마다 여성들에게 과도한 노동을 강요하는 시스템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조상을 기리는 마음 자체가 나쁜 건 아니지 않나 싶기도 하다.


문화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살아 숨 쉬는 생물처럼 변화한다. 조선시대의 제사와 지금의 제사가 다르듯이, 100년 후의 제사는 또 다를 것이다.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게 우리 문화니까 무조건 지켜야 해'라는 강박이 아니라, '왜 이걸 하는가', '이게 지금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 아닐까.


대한민국이 계속 발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도 결국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과거를 박제하려는 게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한 방식으로 문화를 재해석하고 변형시킬 자유를 주는 것.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전통이 누군가에게는 족쇄일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 사이에서 대화하는 것.


피에 새겨진 기억 같은 건 없다. 우리는 각자 자기 삶을 살아가면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간다. 한국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한국 문화를 사랑해야 할 의무는 없고, 한국인이라고 해서 모든 한국 전통을 지켜야 할 이유도 없다. 그저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더 나은 방식을 고민하고, 서로 존중하며, 때로는 과감하게 바꿔나가면 된다.


문화는 강요가 아니라 선택이어야 한다. 제사를 지키고 싶은 사람은 지키되,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지키고 싶지 않은 사람은 지키지 않아도 비난받지 않아야 한다. 그게 진짜 성숙한 문화 아닐까. 누군가의 피에 새겨진 기억을 따라 살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선택으로 만들어가는 문화 말이다.


결국 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과거에 묶일 필요가 없다. 과거를 존중하되, 현재를 살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면 된다. 그게 진정한 발전이고, 그게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새로운 문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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