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와 평가위원이 동시에 좋아하는 문서의 비밀 -
2025년 8월, 한 평가위원이 저에게 솔직히 털어놨습니다.
"3페이지 넘어가면 집중이 안 돼요. 그냥... 읽기 싫어지거든요."
그는 그날 이미 15개의 계획서를 봤고, 아직 10개가 더 남아있었습니다. 읽기 어려운 문서는 읽히지 않습니다.
유창성 효과 : 3초의 판단
평가위원이 문서를 펼치는 순간, 뇌는 이미 판단을 시작합니다. 처음 1초 동안은 전체 레이아웃을 스캔합니다. "빽빽하네..." 또는 "깔끔하네!" 다음 1초는 구조를 파악합니다. 제목이 보이는가? 핵심이 눈에 띄는가? 마지막 1초에 최종 판단을 내립니다. 읽을 만한가? 건너뛸까?
단 3초입니다. 3초 안에 "읽기 쉽다"는 신호를 주지 못하면, 그 문서는 이미 불리한 출발선에 섭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유창성 효과(Fluency Effect)'라고 부릅니다. 정보 처리가 쉬울수록 그 정보를 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현상이죠. 뇌는 에너지를 아끼려고 하니까요. 그래서 "이 문서 읽기 쉽네?"라고 느끼면 자연스럽게 "내용도 좋겠지", "작성자도 전문가겠네"라고 이어집니다. 반대로 "이 문서 읽기 어렵네..."라고 느끼면 "내용도 별로겠지...", "준비 부족이네..."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같은 내용인데도 말이죠. 이건 논리적 판단이 아닌 뇌의 무의식적 반응입니다.
10년간 1,000개가 넘는 R&D 계획서를 검토하면서 명확한 패턴을 발견했습니다. 탈락하는 계획서는 긴 문단이 끝없이 이어지고, "혁신적", "우수한" 같은 추상적 표현만 가득했습니다. 어디가 핵심인지 한눈에 안 보이고, 페이지마다 용어도 바뀌었죠.
반대로 선정되는 계획서는 달랐습니다. 한 페이지에 핵심이 보였고, 숫자로 구체화되어 있었습니다. 구조가 명확했고, 일관된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기술력이 우수한 팀이 탈락하는 경우도 많다는 겁니다. 반대로 기술은 비슷한데 "잘 쓴" 계획서가 선정되기도 했죠. 차이는 단 하나, 읽기 쉬움이었습니다.
점수를 올리는 4가지 패턴 원칙
1. 구조적 패턴 : 지도를 그려라
평가위원이 문서를 펼쳤을 때 "여기가 문제 정의구나, 여기가 해결 방법이고, 저기가 기대효과네"라고 즉시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제목, 중제목, 소제목으로 정보를 계층화해서 명확한 제목 체계를 만들어보세요. 박스, 선, 여백을 활용해 섹션을 시각적으로 분명하게 나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문제에서 해결, 결과로 이어지는 일관된 흐름을 항상 지키세요.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 회사는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이 기술은 여러 장점이 있으며 시장성도 우수합니다. 먼저 성능이 뛰어나고..."라고 쓰는 대신, 이렇게 써보는 겁니다.
【기술 개요】 AI 기반 불량 검사 시스템
【핵심 장점】
① 정확도 97.8% (기존 대비 +15%p) ② 검사 속도 0.5초 (기존 대비 6배 빠름)
③ 비용 30% 절감
같은 내용이지만 훨씬 읽기 쉽죠?
2. 반복적 패턴 : 리듬을 만들어라
같은 구조가 반복되면 뇌는 편해집니다. 다음에 무엇이 나올지 예측할 수 있으니까요.
세부 과제를 설명할 때마다 같은 구조를 사용해보세요. 과제 1은 목표, 방법, 기대효과, 예산 순서로 설명하고, 과제 2도 똑같이 목표, 방법, 기대효과, 예산 순서로 설명하는 겁니다. 두 번째 과제부터는 평가위원이 어디에 뭐가 있는지 이미 알고 있어서 읽는 속도가 2배 빨라집니다.
용어도 일관되게 유지해야 합니다. 처음 "AI 검사 시스템"이라고 했으면 끝까지 그 표현을 쓰세요. 갑자기 "인공지능 품질관리 솔루션"으로 바꾸면 평가위원은 "어? 이게 다른 건가? 같은 건가?"라고 혼란스러워합니다.
3. 정량적 패턴 : 숫자가 신뢰를 만든다
추상적 표현을 구체적 숫자로 바꾸면 뇌는 훨씬 명확하게 받아들입니다. "많은 효과"를 "연간 3억원 절감"으로, "빠른 처리"를 "0.5초 이내 검사"로, "높은 정확도"를 "97.8% 정확도"로 바꿔보세요.
"우리 기술은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키고 비용도 많이 절감할 수 있습니다"라고 쓰면 평가위원은 속으로 "크게가 얼마나 크게?"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기술은 생산성을 42% 향상시키고 연간 운영비를 2.3억원 절감합니다"라고 쓰면 "오, 구체적이네. 이건 믿을 만해"라고 반응하죠.
정량화된 문서는 두 가지 메시지를 동시에 전달합니다. "우리는 이미 계산했다"는 전문성과 "이건 실현 가능하다"는 신뢰성입니다.
4. 표준화된 패턴 : 익숙함이 곧 편안함
새로운 것을 배우는 건 피곤합니다. 평가위원에게 학습을 강요하지 마세요.
업계에서 표준으로 쓰는 용어를 사용하세요. "지능형 품질 검증 플랫폼"보다 "AI 검사 시스템"이 훨씬 낫습니다. 창의적인 용어는 논문에서나 쓰세요. 계획서에서는 누구나 아는 말을 써야 합니다.
문서 구조도 평가위원이 익숙한 순서를 따르세요. 요약으로 시작해서 연구개발 목표, 연구개발 내용, 추진 체계, 기대효과 순서로 이어지는 게 일반적입니다. 표와 차트도 독특한 디자인보다는 평가위원이 0.5초 만에 이해할 수 있는 형식을 선택하세요. 간트 차트로 일정을 보여주고, 바 차트로 비교하고, 파이 차트로 구성비를 나타내고, 표로 상세 데이터를 정리하는 식이죠.
패턴이 만든 점수 차이
실제 사례를 하나 보여드리겠습니다. 2024년 6월, 같은 기술을 가진 두 팀이 같은 사업에 지원했습니다.
A팀은 긴 문단에 추상적 표현, 불명확한 구조로 계획서를 썼습니다. 68점을 받았죠. 평가위원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구체성이 부족하다"고 코멘트했습니다.
B팀은 명확한 제목에 정량화된 목표, 일관된 구조로 계획서를 작성했습니다. 92점을 받았습니다. 평가위원들의 반응은 "체계적이다", "전문적이다"였죠.
24점 차이입니다. 기술력과 예산은 비슷했습니다. 차이는 패턴이었습니다.
쉬운 게 좋은 거다
정리하겠습니다.
평가위원의 뇌는 3초 안에 판단합니다. 유창성 효과는 실제로 작동합니다. 구조적이고 반복적이고 정량적이고 표준화된 4가지 패턴이 점수를 바꿉니다. 같은 기술도 표현 방식에 따라 20점 이상 차이가 납니다. 이건 평가위원이 불공정해서가 아닙니다. 인간 뇌가 원래 그렇게 작동하니까요.
오늘 당장 해볼 수 있는 게 있습니다. 다음 문서의 제목 체계를 점검해보세요. 추상적 표현 3개를 숫자로 바꿔보세요. 과제마다 같은 구조를 적용해보세요.
좋은 내용을 가졌다면, 그것을 쉽게 전달하는 것이 당신의 의무입니다. 평가위원이 편하게 읽을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것이 선정의 첫걸음입니다. 다음 계획서부터 4가지 패턴을 적용해보세요. 당신의 기술이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가 생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