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지원사업 시즌이 돌아왔다. 창업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이맘때면 다들 공고문을 붙잡고 산다. 연구개발계획서 쓰고, 또 고치고. 마감이 다가올수록 문서는 두꺼워지는데, 이상하게 핵심은 더 흐려질 때가 있다.
14년째 이 일을 하면서 매년 느끼는 거다. 다들 열심히 쓴다. 그런데 그 열심함이 자주 놓치는 게 뭔지, 나는 너무 많이 봐서 안다.
연구개발계획서는 70% 이상이 기술 중심이다. 사업계획서보다 기술에 무게가 실린다. 하지만 결국 지원사업에 제출하는 문서라는 점에서는 같다. 요구사항에 맞아야 하고, 평가위원이 보고 싶은 내용이 들어가야 하고, 구성과 내용과 분량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여기까진 대부분 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팩트만 채우면 되는 줄 안다
1,000회 넘게 정부 R&D 과제를 평가했다. 기술적으로 탄탄한 문서, 시장분석이 촘촘한 문서, 양식을 빈틈없이 채운 문서. 많이 봤다.
그런데 읽고 나면 남는 게 없는 문서가 있다.
왜 그럴까. '나'의 이야기가 빠져 있어서다.
기술 스펙, 시장 규모, 경쟁사 현황. 이런 팩트는 당연히 중요하다. 빠지면 안 된다. 하지만 팩트는 '설명'은 되어도 '설득'은 안 된다.
평가위원이 진짜 궁금한 건 이런 거다.
왜 이 기술을 개발하려 하는가. 이번 과제로 뭘 이루고 싶은가. 왜 하필 지금인가. 결국, 왜 당신들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문서는 생각보다 드물다. 그래서 잘 쓴 것 같은데 기억에 안 남는 문서가 나온다.
그래서 나는 인터뷰를 한다
요즘 과제를 시작하면 꼭 인터뷰부터 한다. 대표님이나 연구책임자에게 기술 설명을 듣는 게 아니다. 의도를 묻는다.
"이번 과제로 정말 하고 싶은 게 뭔가요?" "왜 지금 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이 기술이 나오면 뭐가 달라지나요?"
처음엔 어색해하는 분들이 많다. 연구개발계획서 쓰는데 왜 이런 걸 묻나 싶은 표정도 본다.
그런데 대화를 좀 이어가면 눈빛이 달라지는 순간이 온다. 처음 사업을 시작한 이유, 처음 이 연구를 붙잡았던 장면, 해결하고 싶었던 문제. 그 '처음'이 다시 떠오르는 거다.
그 이야기가 문서에 들어가면 무게가 달라진다. 팩트는 똑같아도 문서가 다르다. 차이는 사람 목소리가 들리느냐에 있다.
평가위원도 사람이다
평가위원으로 앉으면 하루에 수십 건을 본다. 솔직히, 비슷한 문서들 사이에서 집중력 유지가 쉽지 않다.
그런데 가끔 손이 멈추는 계획서가 있다. 숫자와 표 사이로 사람 목소리가 들리는 문서다.
"아, 이 팀은 진짜 이걸 하고 싶구나."
그 느낌이 오면 더 꼼꼼히 읽게 된다. 평가위원도 사람이다. 진정성이 느껴지면 마음이 간다.
올해부터 AI가 서면평가를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지금 보기엔 하반기로 밀린 것 같다. AI 평가가 오면 양식 준수, 정합성은 더 중요해질 거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AI가 걸러낸 다음, 최종 선정은 사람이 한다. 대면평가는 여전히 사람 영역이다. 그리고 대면평가 자료는 서면을 기반으로 만든다. 서면에 스토리가 없으면 대면에서 갑자기 꺼내기 어렵다.
스토리는 발표장에서 만드는 게 아니다. 문서에서 준비하는 거다.
전문가의 역할
지원사업 시즌엔 다들 바쁘다. 마감에 쫓기고, 양식 맞추랴 내용 채우랴 정신이 없다. 그러다 보니 마지막 한 끗을 놓친다. 팩트는 다 들어갔는데, '왜 우리인가'에 대한 답이 없는 문서가 제출된다.
이걸 짚어주고, 끌어내주고, 문서에 녹여주는 게 전문가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양식 채우는 건 누구나 한다. 고객의 이야기를 듣고, 그걸 평가위원에게 닿는 언어로 바꿔주는 일. 그게 진짜 일이다.
지원사업 문서는 '잘 쓴 문서'가 목적이 아니다. 선정되는 문서가 목적이다. 선정되는 문서는 대부분 정합성 위에 스토리가 올라가 있다.
계획서 쓰기 전에 잠깐 멈춰서 스스로 물어보시길.
"이 문서에 '나'는 있는가?"
그 질문에서 시작하면 방향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 방향은 평가위원이 문서를 읽는 방향과 정확히 겹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