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단상 42. 희망이라는 이름의 처방전

작가 단상 41은 skip해요. 언젠가 다시 쓰겠죠

by 여철기 글쓰기

우울증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불면과 우울증의 상관관계는 높다. 잠을 못 자면 우울해지고, 우울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 악순환이다. 하지만 우울증의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이다.


숨 쉬는 것도 귀찮다. 밥 먹는 것도 귀찮다. 샤워하는 것도, 문 밖을 나서는 것도, 누군가에게 답장을 보내는 것도.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무거운 짐처럼 느껴진다. 남들은 “그 정도야?”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하루가 아니라 매 순간이 버거운 싸움이다. 마음이 약해진 게 아니라, 마음의 엔진 자체가 멈춰버린 상태에 가깝다.


치료 방법은 있다. 약물치료가 있고, 상담치료가 있고, 인지행동치료가 있다. 방법은 많다. 그런데도 완치가 늘 쉽지는 않다. 재발이 잦다는 이야기 또한 자주 들린다. 한 번 빠져본 사람은 안다. “이제 괜찮아졌다”는 확신이 생겼을 때조차,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발목을 잡힐 수 있다는 걸. 우울증은 사람을 아프게 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다시 아플까 봐 두려워하게 만드는 병이기도 하다.


나는 그 근본적인 원인을 ‘희망의 부재’에서 찾는다.


오늘 밤 눈을 감았는데, 내일 아침 눈 뜨는 게 무섭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거라는 기대가 없다. 아니, 내일도 오늘 같을 거라는 확신이 생긴다. 그리고 그 확신이 사람을 무너뜨린다. 희망이 없는 상태란, 단순히 기분이 가라앉는 게 아니다. 미래를 바라보는 기능이 망가지는 것이다. 내일이 ‘가능성’이 아니라 ‘형벌’처럼 느껴질 때, 사람은 일상을 견딜 힘을 잃는다.


이런 우울은 정도의 차이일 뿐, 사회 전반으로 퍼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청년들. 일자리 문제, 주거 문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열심히 해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감각이 세대 전체를 짓누르는 듯하다. 뉴스에서 청년 우울 통계를 볼 때면 숫자가 아니라 얼굴들이 떠오른다. 내 주변의 누군가, 혹은 내 아이의 친구들, 그리고 곧 사회로 나갈 아이의 미래까지.


큰딸이 곧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사회로 나간다.


어른으로서 걱정이 앞선다. 세상의 모진 풍파에 꺾이지 않아야 할 텐데. 기대가 높을수록, 꿈이 클수록, 좌절과 우울감도 깊어진다는 걸 나는 안다. 젊은 날의 패기가 클수록 현실의 벽 앞에서 받는 충격도 크다. “크게 꿈꿔라”는 말이 때로는 날개가 되지만, 때로는 무게가 된다. 그 무게가 마음을 짓누르는 순간이 올까 봐—그게 무섭다.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 그런데 섣불리 나서기가 조심스럽다. 조언이 잔소리가 되고, 걱정이 압박이 되는 순간을 너무 많이 봤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라는 문장이 사실은 가장 위험한 문장이 될 때도 있다. 상대가 힘들어하는 건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버틸 에너지가 고갈되어서일 수 있으니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옆에서 잘 지켜보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넘어지면 일으켜주고, 지치면 쉬어가게 하고, 무엇보다 언제든 돌아올 곳이 있다는 걸 알게 해주는 것. 그러니까, 내가 줄 수 있는 희망은 거창한 성공의 약속이 아니라 “너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어떤 날은 말보다 밥 한 끼가, 어떤 날은 조언보다 침묵이, 어떤 날은 해결책보다 “응, 그럴 수 있어”라는 한 문장이 더 큰 처방전이 된다.


사실 나도 한 번 겪어봤다. 우울증을.


그래서 더 조심스럽다. 그 어둠이 얼마나 깊은지, 그 안에서 손 내미는 것조차 얼마나 힘든지 안다. 밖에서 보기엔 멀쩡해 보여도 안에서는 천천히 가라앉고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사람은 무너질 때 소리를 내지 않는다. 조용히, 티 나지 않게, 일상을 유지하는 척하면서 무너진다.


오늘도 큰딸 앞에서 연기를 한다. 고민 없는 아빠, 든든한 아빠, 늘 괜찮은 아빠. 내 걱정은 내 안에 접어두고, 아이 앞에서는 평온한 얼굴을 유지한다. 그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말해줄 날이 올지도 모른다. 아빠도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고. 그래도 버텼다고. 그리고 너도 버틸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을 꺼내는 방식과 시점 역시 조심스럽게 고르고 싶다. 누군가에게 희망은 “괜찮아질 거야”라는 단정이 아니라, “괜찮지 않아도 네 편이야”라는 약속에서 시작되니까.


그날이 오기 전까지 나는 오늘도 조용히 지켜본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처방전을, 큰소리로 들이밀지 않고.
그저 아이가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도록, 내 주머니 속에 오래 넣어두는 마음으로.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작가 단상 40. 발명보다 배움이 필요한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