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단상 40. 발명보다 배움이 필요한 시절

by 여철기 글쓰기

바이브 코딩에 빠져 있던 몇 달 전, 저는 묘한 전능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프롬프트 몇 줄이면 웹사이트가 뚝딱 만들어지고, 복잡한 로직도 AI와 대화하듯 풀려 나갔습니다.


“이 정도면 뭐든 만들 수 있겠는데요?”


그 생각은 의외로 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제 안에 자리 잡았습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외주를 맡기거나, 혹은 “이건 내 영역이 아니야”라며 뒤로 미뤘을 기능들을, 실제로 제 손으로 구현해내고 있었으니까요.
개발이라는 세계가 더 이상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지지 않는 경험.
그 경험이 사람을 꽤 대담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요즘, 그 자신감에 조금 균열이 생겼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감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방향이 바뀌었다고 해야겠습니다.
제가 며칠 밤을 새워 만든 기능이, 다음 주에 등장한 새로운 서비스에서 더 세련된 형태로 제공되는 일을 몇 번 겪고 나니… 묘한 깨달음이 왔습니다.


아, 나 혼자 발명하려고 애쓸 일이 아니구나.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필요가 생기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발명이 따라온다는 뜻이지요. 맞는 말입니다.


다만 요즘 시대에는 이 공식에 문장을 하나 덧붙이고 싶습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이되, 그 발명을 하는 사람이 꼭 저일 필요는 없다는 것.


전 세계의 개발자들은 매일 새로운 도구를 내놓고, AI 모델은 분기마다 눈에 띄게 진화합니다. 제가 “이런 게 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누군가는 그걸 만들어 배포하고 있더군요.
심지어 제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더 우아하게요.


처음엔 조금 허탈했습니다.
내가 만들려던 건데.
내가 먼저 생각했는데.


그런데 곧 알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이야말로 꽤 큰 축복이라는 것을요.
누군가가 대신 발명해주었다는 건, 저는 더 중요한 곳으로 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저는 원래 뭐든 직접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입니다.
바둑도 책보다 실전으로 배웠고, AI 서비스도 일단 부딪히며 익혀 왔습니다. 그래서인지 ‘배운다’는 행위가 어느 순간부터는 조금 수동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뭔가 만들어내야 진짜 실력이 느는 것 같고,
그냥 익히기만 하면 시간 낭비 같은 느낌.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다릅니다.


잘 배우는 것도 능력이고, 어쩌면 지금 이 시대에는 잘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능력일 수 있겠다고요.
세상에 좋은 도구가 넘쳐나는데, 그걸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일까요.
바퀴를 다시 발명하느라, 정작 가야 할 길을 놓치는 일이 생깁니다.


그리고 저는… 그 길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발명가보다 학습자로 살기로 했습니다.
새로 나오는 모델의 특성을 파악하고, 남들이 만든 서비스를 직접 써보면서, “이건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를 오래 생각해보려 합니다.


예전의 저라면 “나도 저거 만들 수 있어요”가 먼저였을 텐데,
요즘의 저는 “저걸 어떻게 잘 쓸 수 있을까요”가 먼저 떠오릅니다.


어쩌면 이게 진짜 성장인지도 모릅니다.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배울 수 있다는 겸손으로.
발명의 욕구에서, 활용의 지혜로.
뭐든 다 해보겠다는 패기에서, 꼭 필요한 걸 제대로 하겠다는 선택으로.


필요는 여전히 발명의 어머니입니다.
다만 그 발명이 제 손에서 나올 필요는 없다는 걸, 저는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누군가가 만든 새로운 도구 앞에서,
기꺼이 학생이 되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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