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덩이와 손에서, 눈과 머리로: 전문가의 생존법

by 여철기 글쓰기

예전에 일 잘한다는 건 무엇이었을까요.

오래 앉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새벽까지 자리를 지키고, 주말에도 나와서,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쏟는 사람. 그게 성실함의 증거였고, 실력의 척도였습니다. 손도 빨라야 했습니다. 타자 속도, 문서 작성 속도, 엑셀 함수를 넣는 속도까지. 같은 시간에 더 많은 페이지를 뽑아내는 사람이 인정받았습니다. 엉덩이로 버티고, 손으로 찍어내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량으로 실력을 증명했습니다. 10페이지보다 50페이지가 더 많은 노력을 담고 있다고 믿었고, 두꺼운 보고서가 곧 전문성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AI가 등장했습니다. 이제 70페이지짜리 사업계획서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14분입니다. 엉덩이를 오래 붙이고 있는 것, 손이 빠른 것—이런 건 더 이상 경쟁력이 아닙니다.

엉덩이와 손을 내려놓고, 눈과 머리를 써야 할 때입니다.


1. 엉덩이와 손의 결과는 분량일 뿐입니다

전통적인 작업 방식에서 손은 생각을 옮기는 도구였고, 엉덩이는 그 도구를 지탱하는 동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물리적인 노동을 AI가 단 몇 분 만에, 그것도 아주 매끄러운 문장으로 대신합니다.

내가 일주일 동안 버티며 일구어낸 결과물이 AI의 1분보다 가치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단순히 노동의 양으로 승부하는 시대는 이미 끝났습니다. AI에게는 지치지 않는 손과 짓무르지 않는 엉덩이가 무한대로 있으니까요.


2. 눈과 머리가 품질을 결정합니다

이제 생존의 키워드는 생산이 아니라 판단입니다.

AI가 쏟아내는 수많은 초안 중에서 무엇이 진짜 가치 있는 정보인지 가려내는 눈이 필요합니다. 맥락을 읽고, 어긋남을 감지하는 감각. 그것이 전문가의 급을 결정합니다.

머리는 판단하는 힘입니다. 파편화된 정보를 엮어 강력한 논리를 만들고, 이 전략이 현실에서 통할지 경험과 통찰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 엉덩이와 손의 결과가 문서의 분량이라면, 눈과 머리의 결과는 문서의 품질입니다.

이제 전문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AI가 만든 결과물을 검토하고 승인하는 게이트키퍼가 되어야 합니다.


3. 어떻게 쓸까가 아니라, 어떻게 볼까를 고민하십시오

생존을 위해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빨리, 더 많이 쓸까—이 고민은 AI에게 맡기면 됩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질문은 따로 있습니다.

이 문서가 목표로 하는 본질적인 가치는 무엇인가?

AI가 놓친 이 비즈니스의 미묘한 뉘앙스는 무엇인가?

수많은 데이터 중에서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남길 것인가?


결국 눈과 머리를 쓴다는 것은 비판적 사고와 전략적 선택에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손기술 좋은 기능공에서, 전체를 조망하고 품질을 책임지는 감독으로. 직무의 무게중심을 옮겨야 합니다.


나가며 : 경쟁력은 이제 판단에서 나옵니다

분량의 시대가 끝나고 품질의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예전엔 "얼마나 많이 만들었느냐"가 물음이었다면, 이젠 "얼마나 제대로 만들었느냐"가 물음입니다. AI는 분량을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품질은 여전히 사람의 몫입니다.

엉덩이의 성실함을 머리의 영리함으로, 손의 속도를 눈의 깊이로 치환하십시오.

경쟁력은 앉아 있는 시간이 아니라 판단하는 능력에서 나옵니다. 그것이 AI라는 강력한 엔진을 장착하고도 휘둘리지 않는, 이 시대 진짜 전문가의 생존법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실무 26. 연구개발계획서에 '나'는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