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무 27. 서면평가를 통과했다고 안심하셨나요?

진짜 승부는 지금부터입니다

by 여철기 글쓰기

13년간 R&D 컨설팅을 하면서 수많은 기업의 희비를 지켜봤습니다. 서면평가를 통과했다는 연락에 환호하던 대표님들이, 대면평가 탈락 소식에 멍하니 전화기를 내려놓는 모습도 여러 번 봤습니다.

그때마다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서면은 그렇게 공들였는데, 발표에서 떨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솔직히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같은 착각 속에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기업이 서면평가에 모든 에너지를 쏟습니다. 이해합니다. 경쟁률이 높으니까요. 수십 대 일의 경쟁을 뚫어야 하니, 연구개발계획서 한 줄 한 줄에 목숨을 겁니다. 반면 대면평가는요? 경쟁률이 평균 1.5대 1 정도입니다. "에이, 여기까지 오면 반은 붙는 거잖아"라는 분위기가 퍼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숫자가 함정입니다.

대면평가장에 남은 기업들이 어떤 기업인지를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쭉정이는 이미 다 떨어졌습니다. 서면평가라는 체를 통과한, 기술이 있고 사업성이 있고 문서도 잘 쓰는 기업들만 남은 겁니다. 이 상향 평준화된 전장에서의 1.5대 1은, 서면에서의 10대 1보다 훨씬 치열합니다. 여기서 탈락하는 이유는 결함이 아닙니다. 아주 작지만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원칙이 있습니다. 대면발표자료의 근본은 서면평가 시 제출한 연구개발계획서라는 점입니다. 서면자료에 없는 내용은 아무리 좋아도 참조 사항일 뿐, 평가에 반영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역효과가 납니다.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서면에 없던 내용을 발표에서 꺼내면, 평가위원의 머릿속에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그 내용은 서면에 왜 없나요?" "그럼 제출자료가 최신이 아니라는 뜻인가요?" 이 의심이 생기는 순간, 점수는 조용히 내려갑니다.


그렇다면 같은 내용인데 뭘 다르게 하라는 건가. 여기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서면평가는 평가위원이 "읽는" 것입니다. 논리를 따라갈 시간도 있고, 표와 근거를 천천히 확인할 여유도 있습니다. 앞뒤 페이지를 넘겨가며 비교도 가능합니다.

대면평가는 "보고 듣는" 것입니다. 프레젠테이션입니다.

서면의 빽빽한 텍스트를 그대로 PPT에 옮겨 담는 것은, 평가위원에게 "제가 읽을 테니 시간이나 맞춰주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발표자료는 서면의 내용을 기반으로 하되, 그 위에 메시지를 얹고 감성을 건드려야 합니다. 대표님의 절실함, 기술에 대한 확신, 시장을 바라보는 안목. 이런 것들은 글에서는 전해지기 어렵지만, 발표장에서는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이 부분이야말로 AI가 쉽게 근접하기 어려운 영역이기도 합니다. AI는 문장을 매끈하게 다듬고 구조를 정리해줄 수 있지만, 평가위원의 감정선이 어디서 흔들리고 어디서 확신이 생기는지, "이 대표가 정말 이 과제를 끌고 갈 사람인지"라는 미세한 신뢰의 감각은 결국 사람의 프레젠테이션에서 갈립니다.

정말 지원사업을 잘하는 기업들의 프로세스를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대면발표 자료를 먼저 만듭니다. 더 정확히는, 핵심 메시지부터 먼저 세웁니다. 우리가 왜 지금 이 과제를 해야 하는지, 어떤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는지, 무엇이 차별성인지, 왜 우리가 할 수 있는지, 성공하면 어떤 파급이 생기는지.


이 다섯 가지가 발표자료에서 선명해지면, 서면자료는 그 메시지에 근거를 붙여 확장하는 작업이 됩니다. 발표자료가 방향타가 되고, 서면자료가 엔진이 되는 겁니다. 프로세스가 평가 순서와 정반대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최근 45억 원이 넘는 대형 과제의 자문을 맡으면서 이 사실을 더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서면평가는 매번 잘 통과하면서도, 대면평가 선정률이 50%에 머물러 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 업무 범위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서면 컨설팅까지만 하고, 발표 준비는 주관기관이 알아서 잘하시겠거니 생각했습니다. 대표님이 발표 경험이 있으니 괜찮겠지, 자료만 있으면 말로 풀어낼 수 있겠지. 그게 착각이었습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제대로 하려면 발표자료를 깔끔하게 만드는 수준을 넘어서야 합니다. 스크립트는 슬라이드별로 핵심 메시지가 한 문장으로 고정되어야 하고, 숫자와 근거는 '읽는 글'이 아니라 '들리는 말'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Q&A는 리스크, 경쟁, 일정, 인력, 예산 같은 약점 질문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리허설. 대표님의 언어가 계획서의 논리와 정확히 맞닿을 때까지 반복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가 맞물리는 순간, 대면평가에서 점수가 올라갑니다. 분리되는 순간, 서면을 통과하고도 대면에서 떨어지는 일이 벌어집니다.

1,000건이 넘는 과제를 평가해 온 경험으로 말씀드립니다. 평가위원은 발표장에서 계획서를 다시 읽지 않습니다. 발표자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이 과제의 진심을 읽습니다. 그 진심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것. 그것이 대면평가의 본질입니다.


서면평가 통과에 기뻐하고 계신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아직 기뻐하실 때가 아닙니다. 진짜 승부는 지금부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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