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집에서 손수 기르신 거라며 여러 가지 야채를 싸서 보내주셨는데 네가 생각나더라. 가까이 살면 나누어 먹을 텐데 하고 생각했어."라는 친구와의 통화에 순간 눈물이 핑 돌았고 살아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것을 잊고 잠시 욕심을 부렸다.
"너는 좋겠다. 엄마가 건강하셔서....."
우리 엄마보다 연세가 더 많으심에도 관절염으로 고생하시는 것 말고는 비교적 건강하신 친구의 엄마는 교회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올라오셔서 모녀간의 행복한 상봉은 물론 올라오신 김에 딸네 집에 들러서 하룻밤 주무시고 내려가시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한창 젊어 애 키우고 살 때야 정신없이 사느라 여념이 없다보니 남들 사는 것 보고 미처 부럽다는 생각을 못했었다. 그런데 마흔이 넘고 보니 사랑하는 맏딸이 어떻게 사는지, 어드메 사는 지도 전혀 가늠 못하고 평생을 멀미로 꼼짝 못하고 살아가시는 우리 엄마를 생각하면 목이 메어온다.
예제 좋다는 산천 구경도 한 번 못해보고 먼 거리의 교회만 오롯이 걸어서 정성스럽게 다니셨으니 이 시대에 우리 엄마와 같은 분이 또 계실까?
아침밥을 먹고 나면 으레껏 밥상을 한 쪽으로 밀쳐두고 한숨 주무시고 일어나야만 했던 우리 엄마를 어렸을 적에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어디가 특별하게 아픈 곳도 없이 늘 힘들어하는 지금의 내 모습이 어린 시절 우리 엄마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마음이 아프다.
타고난 체력과 체질이 남보다 약했던 탓에 매년 1~2번은 한약을 먹어야만 일상생활이 가능한 지금의 나처럼 우리 엄마도 한약재를 지어다 손수 집에서 다려드셨던 기억이 난다.
유난히 병치레가 많았던 나는 어렸을 적 걷기보다 주로 엄마 등에 업혀 지냈었다. 학창시절에는 식은땀을 흘리며 뒤척이다 잠에서 깰 때면 엄마는 늘 내 머리맡에 앉아서 기도하고 계셨고 결혼 후에는 손수 약을 다려서 올려보내주시곤 했었다.
어느 덧 세월이 많이 흐르고 심약해진 우리 엄마를 내가 보살펴 드려야 함에도 멀리서 직장에 다닌다는 이유로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방학 때만 고작 며칠 내려가 엄마와 함께 하는 것으로 도리를 다하고 있으니 마음이 늘 급해진다.
시어머님께서도 약한 몸으로 당신 손주들을 키워주신 사돈이라며 각별한 심정으로 늘 안타까이 여기셨었다.
"나는 사돈들이 많지만 네 엄마가 제일 마음에 걸린다. 좋은 곳도 한번 가보지 못하고 너희가 어떻게 사는지 와보고 싶을 텐데도 오지도 못하고 애만 태울 것을 생각하면 내가 맘이 아프고 안쓰러워. 내가 해야 할 일을 네 엄마가 해주셔서 항상 고마워하고 있으니 건강하시라고 꼭 말씀드려라."
성치 않은 몸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부터 잦은 병치레로 몹시 힘들게 했을 당신의 맏딸을 밉다하지 않으시고 이 나이가 되도록 늘 염려하고 챙기신다. 당신의 특별했던 아들 장남을 잃으신 후 기억이 흐려진 상황에서도 전화만 드리면 잊지 않는 말이 있다.
"몸은 괜찮냐?"
언제부터인가 철이 든 나는 친정은 더이상 쉬러 가는 곳이 아니었다. 오랫만에 친정에 갈 때마다 우리 엄마를 위해서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고 올라와서 며칠 동안 호된 몸살에 끙끙 앓곤 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 몸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엄마는
"너는 친정에만 오면 더 힘들어. 네 집에 있어야 편해."라시며 늘 염려하셨다.
큰딸이 보고 싶어 그렇듯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셨음에도 내려오면 고생한다시며 아무말 없이 끌어 안아주시는 우리 엄마와 가까이서 함께 살 수 있기를 매순간 꿈꾸고 있지만 현실은 쉽지가 않다.
아무쪼록 엄마와 함께 살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도하고 있고 그 때까지 건강하시기를 두 손 모아 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