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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행복

아침 식사와 도시락

by 이옥임

몇십 년 만에 싸는 도시락일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딸은 40대의 문턱을 넘어섰고 아들은 이제 막 40의 문턱에 올라섰으니 도시락을 싼 지가 근 20년은 족히 넘은 것 같다.


현직 때 가장 힘들어했던 이른 아침 기상이 건강을 찾고보니 식은 죽 먹기다. 현직에 있는 동안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너무나도 힘들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해했던 것은 일단 출근하고 나면 우리 아이들과 행복하게 생활했다는 점이다. 마치 천직인 것처럼... 동료들이 나에게 딱 맞는 천직이라고들 했으니까....


70을 목전에 두고 남편의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다. 일터로 가기 위한 도시락이 아니라 남편의 놀이 활동을 위한 도시락이다.


현직 때는 부부가 테니스에 빠져 살았다면 퇴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와서 남편은 골프에 빠져 살고 있다. 회원들의 수가 100명이 훌쩍 넘는 테니스 그룹의 회장을 지냈던 남편은 이제는 골프 그룹의 총무로 선배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남편의 그룹이 속해 있는 윈도우장 근처에 얼마 전 스크린 골프장이 생겨서 총무인 남편은 단톡방으로 참여자를 파악하고 전화 예약을 해둔다. 매일 3~5명이 어울려서 1인당 소액으로 스크린 골프 비용과 점심까지 해결, 좋은 분들과 가성비 좋은 놀이를 하고 있다며 자랑했었다.


한창 젊어 직업군이 다양했던 선배들은 지혜롭고 발 빠른 추진력을 지닌 남편을 신뢰하고 남편이 추진하는 대로 적극 참여하는 분위기를 잘 알기 때문에 즐겁게 도시락을 싸주고 있다. 그것도 새벽 5시에 일어나서... 현직 때였다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이른 기상이다.


보통 20년 이상 고지혈증 또는 당뇨약을 먹고 있는 분들이 많은 가운데 우리 부부는 지병으로 인해 먹고 있는 약이 전혀 없으니 ‘감사하게도 건강한 편이구나’ 새삼 느끼는 요즘 남편의 건강을 위해서 새벽부터 일어나서 아침 식사와 도시락을 준비하는데도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남다른 미각을 타고난 남편과 미각이 떨어지는 나는 퇴직 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충돌이 많았었다. 마치 먹는 것에 목숨을 건 사람처럼 음식에 유난히 민감하고 날카롭게 반응하는 남편으로 인해 나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건강해지고 나니 남편의 입장에서 생각할 겨를이 생겼고 남편의 입맛을 충족시켜주지 못한 나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리에 관심과 흥미가 없는 와이프로 인해 남편이 많이 힘들었겠구나’ 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참으로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의도가 전혀 아니었지만 남편에게 많이 미안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남편의 입맛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최근에 요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한달 전 남편의 고지혈과 당뇨 전단계라는 진단을 받고 아침 식사는 야채 김말이를 해주고 있다. 내가 먹어봐도 맛있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은

“당신이 요즘 요리에 관심이 생겨서 다행이야. 나는 당신이 맛있는 것만 해주면 행복해!”라며 어린아이처럼 진심 행복해하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행복해졌다. 예전 같았으면

“여보, 미각을 타고난 당신이 요리를 더 잘 하잖아. 당신이 요리해서 맛도 모르고 음식 만드는데 힘들어하는 불쌍한 와이프와 함께 먹으면 안돼?”라고 했을 텐데 관심을 가지고 도전하는 내 자신이 흐뭇하다.


그동안 끼니를 떼우기 위해 마지못해 했던 요리였다면 이제는 남편과 더불어 행복한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가장 힘들고 어렵다고만 생각했던 요리를 예전처럼 미리 겁내고 포기했던 내가 이제는 아니다.


내가 왜 그렇듯 요리에 관심과 흥미가 없었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약한 체력으로 직장과 집안일을 병행해야 했던 나는 늘 삶이 버거웠었다. 시간에 쫓겨 식사도 선걸음으로 대충 하고 서둘러 출근했던 오랜 세월 습관이 되어서 퇴직 후인 지금도 서서 식사를 해결한다.


퇴근해서는 손에 잡히는대로 먹어가면서 가족들의 식사를 그것도 빠른 시간에 준비하고 쉬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으니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집중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집중할 수 없는 상황과 몸 상태였으니 안 되는 체력으로 두 마리 토끼를 잡느라 정말 많이 애썼다고 나를 칭찬해주고 싶다.


사랑하는 남편이고 가족이기 때문에 이해해주고 가정에서의 내 부족한 부분은 남편이 채워주기를 기대했지만 힘들어했던 주방일만큼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남편을 원망하거나 서운해하지 않는다. 내가 넘어야 할 벽이고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며 살았으니까......


남편과 아들이 그리도 좋아하는 게장을 처음으로 담가보았다. 정작 해보니 어렵지 않은 것을 그리도 겁을 먹고 구입해서 먹거나 식당에 가서 먹었으니 이번 추석이 기대된다. 아들이 내려오면 엄마가 담가준 게장을 먹으며 얼마나 좋아할까?

엄마가 해주는 식혜가 가장 맛있다는 아들인데 게장까지 더해지면

“와, 엄마가 게장까지 할 줄 알아?”라며 놀랄 모습에 절로 즐거워진다.

남들이 못하는 것들을 잘 한다며 부러움을 받았지만 정작 내가 부러웠던 사람은 요리 잘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현직에 있을 때 급식 교사가 부러웠던 것은 내가 못하는 맛있는 요리들로 가족들을 행복하게 해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관심을 가진 만큼 보이고 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면서 맛있는 것에 늘 목이 말라있는 사랑하는 두 남자들을 위해서 꾸준히 요리에 도전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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