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햇살
방학이 시작되고 하루의 일과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운동을 강행하기 위해서 영하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오후 2시 넘어서 집을 나섰다. 춥다는 이유로 밥 먹듯이 숨 쉬듯이 해오던 운동을 띄엄띄엄 건너뛰기를 하고 있어서 더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서둘러 모악산으로 갔다.
사람의 생각은 비슷한 모양이다. 내 앞서 가던 부부 가운데 와이프가 후드 모자를 벗으며
"나올 때는 추워서 심난했었는데 막상 나오니까 안 춥네."라는 말을 듣고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오랫만에 나온 사람과 운동이 습관이 된 사람들은 옷차림부터 달랐다. 추위에 지레 겁을 먹고 단도리를 하고 나갔으니 상하 내의에 목도리, 입마개를 하고도 후드모자까지 푹 뒤집어 쓴 나와는 다르게 가벼운 옷차림의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혹한에도 레깅스 차림의 가을 복장이 신기하기만 했다.
나무들 사이로 새어든 오후의 햇살이 유난히 눈부시다. 눈부신 햇살을 보면 가슴이 벅차오르고 마냥 행복해진다. 그래서 쏟아지는 햇살 아래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햇살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있었으니 햇살멍이라고 해야 하나?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하게 살다가 고향으로 내려온 언니에게 막내 여동생은
"언니, 이렇게 앉아있으니까 언니 집에서 멍 때리기 너무 좋다. 그동안 너무나 바쁘게 살았으니까 이제는 여유롭게 하늘도 바라보고 저 앞산도 바라보면서 멍 때리기를 즐겨봐. 멍 때리기가 의외로 매력있다."했지만 당시에는 멍 때리기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8년이 지난 요즘에는 우리 막내의 멍 때리기가 정신 건강에 얼마나 유익한지 절감하고 있다.
우리집을 맡아서 지어주시기로 한 건축가이신 둘째 시숙님께서 남편을 김포로 부르셔서 여러 집의 모델을 보여주시며
"제수씨가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는 예술가이니까 살짝 기울어져 있는 저 빨간 집이 어떠냐?"라고 하셨다는 말씀을 전해 듣고 내가 원하는 조건을 남편에게 말했다.
"나는 예쁘고 좋은 집 원치 않아. 밖에서 볼 때 예쁘고 좋은 집은 실내에 들어가보면 어두워서 싫더라구. 내가 원하는 것은 딱 2가지야. 첫째 남향, 둘째 거실 통창이야. 외관은 단순하게 직사각형이어도 좋아. 하루종일 따스한 햇살만 가득 들어오면 돼."
자라면서 어두운 집안이 너무나 싫었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도 집안은 어두워서 한밤중인줄로만 알았고 그래서 새벽에 일을 나가시는 아버지와 아버지를 챙겨야 하는 엄마 외에 우리들이 다들 늦잠을 자는 습관이 생기지 않았나 생각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즈음에는 햇살이 환하게 들어오는 거실에 누워계시도록 아파트로 모시려고 애를 썼었다. 결국 큰딸의 간절한 마음만 뒤로 한 채 먼 길 떠나셨지만...
하루종일 거실 테이블에 앉아 책을 보고 성경을 읽고 모닝콜 예습을 하는 것으로도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하루 생활이 햇살 가득한 거실에서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분하거나 지루할 틈이 없다. 방학이니 운동할 때 외에는 전혀 바깥 외출을 하지 않는 편이다.
넓은 거실 통창으로도 모자라 하늘창의 햇살까지 여름에는 깊게 들어오는 따가운 햇살을 막기 위해 하늘창에 우드락을 대준다. 그리고 겨울에는 우드락을 떼어내면 적당한 햇살이 통창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더해져서 집안을 따뜻하게 데펴주니 냉난방을 위해서 특별히 신경을 쓰셨다는 시숙님의 공로가 배가 된다.
고향으로 내려온 뒤 8년이 지나서야 하늘멍, 햇살멍 등 다양한 멍들과 함께 눈부신 햇살에 행복감을 오롯이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평안함을 느끼며 여유롭게 누려야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게 된 셈이다. 살아가는데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중요한지 하나씩 깨달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