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슬픔은 사치였어

조문

by 이옥임

"내 동생 가고 나서 지난주까지만 해도 눈물로 기도했었거든. 그런데 이번 주에는 전혀 눈물이 나지 않았어."


이유인즉슨 내가 좋아하는 언니가 최근에 45세 젊은 가장의 비보와 65세 말기암 가장, 94세 노모의 연이은 조문에 다녀와서 살아온 날들보다 훨씬 짧은 살아야 할 날들에 대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단다.


고인들 중 가장 젊은 나이인 45세의 가장을 불시에 잃게 된 가족을 보면서 동생을 보내고 힘들어했던 언니의 아픔이 그들 앞에서 얼마나 큰 사치였는지 깨닫게 되었다며 앞으로는 울지도 아파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후에 신기하게도 눈물이 나오지 않고 동생이 남겨준 많은 것들에 대해서 감사하게 되었다고......


"사실 이번에 우리 동생 보내고 나서 옥임이 네 아픔도 알게 되었잖아. 남동생 잃고 나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너그 어매도 그래서 치매가 빨리 온 거였어. 장남이었잖아. 엄마의 아팠던 심정이 이해가 되더라구."


"나는 내 아픔과 고통이 가장 큰 것으로만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어.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기막힌 사연들을 보고 들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생각하게 되었어."


언니 말대로 나 역시 30여년 전 3살과 5살 어린 두 아들을 남기고 교통사고로 떠난 남동생이 있었다. 엄마에게는 딸 셋에 이어 어렵게 낳은 귀한 아들이었는데 녀석이 가고 난 뒤 우리 엄마는 세상사 모든 관심에서 벗어나 2년 동안 하루종일 잠만 주무셨었다. 금세라도 돌아가실 것처럼... 주변에서는 몸져 누우신 아버지보다도 엄마가 먼저 세상을 떠날 것 같다고 염려들을 했었다. 아버지도 그랬으니까...


"옥임아, 너그 어매가 나보다 먼저 갈 것 같다. 하루종일 저렇게 잠만 잔다. 너 언제 방학하느냐며 묻고 전화하더니 그것도 잊어버렸어."


2년 뒤 다행히 좋아졌다 싶었는데 힘든 몸으로 겨우내 아버지 보내드리고 나서 치매에 걸려 다시 엄마만의 세계에 갇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채 오빠만 찾다가 가셨다. 결혼도 안 하고 곁에서 돌봐드린 당신의 막내 아들을 엄마는 오빠라고 부르셨다.


45세였던 고인은 초등학교 두 어린 아들의 가장으로 시력을 잃고 난 뒤 직장도 잃게 되었단다. 하루종일 집안에서 지내면서 무력감에 홀로 밖에 나갔다가 끔찍한 사고를 당했는데 가족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사고가 났는지 모른다고 했단다.

병원에서 연락받고 달려갔을 때는 이미 생사의 갈림길에서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고 결국 이틀 뒤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다며 가족들의 슬픔이야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지만 조문객들의 슬픔도 컸다고 한다.


언니 이야기를 들으면서 결코 남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에게도 40대 중반 세 아이의 가장인 사위가 있고 미혼인 불혹의 아들도 있으니 어찌 남 이야기라고 무심히 넘길 수 있을까? 가슴이 못내 저려왔다.


60대 중반의 고인은 암을 앓게 되면서 고향에 농막을 짓고 내려왔다고 했었다. 초기에는 와이프가 몇 번 보이는가 싶더니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았다며 주변 사람들이 아픈 사람 혼자 두고 왜 와이프는 내려오지 않느냐며 궁금해 했었단다.


말기암이 되면서 거동이 불편해진 아버지를 딸이 서울로 모셔갔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비보 소식이 전해졌다. 퇴근한 지인들이 한 차로 김포 장례식장에 올라가면서 그 때에야 와이프가 후처였다는 것을 처음으로 들었다며 장례식장에서도 와이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단다.


고인이 우리 집에 온 호돌이의 주인이기 때문에 모른체 할 수 없다며 지인들과 함께 김포 장례식장에 올라갔던 남편이 자정이 넘어서 들어왔다. 그렇게 휑한 장례식장은 처음 보았다며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외롭게 고독사 한 것이나 다름 없더란다.


남편도 이번 조문을 통해서 젊어서야 다들 정신없이 살다가도 노후에는 평안한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며 남은 삶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고민하게 되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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