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캠핑카와 손등의 강아지풀

멀리 보이는 야경과 손등에 올라 온 강아지풀

by 소미소리


우리가 묵고 있는 함덕 해변 바로 우측에 서우봉이 있다. 서우봉은 100미터가 약간 넘은 야트막한 기생화산 봉우리이다. 일출(2022/7/30 기준, 오전 5:44)이 예쁘다는데, 우리가 간 시각은 일몰이 지는 시각(같은 날 기준, 오후 7:36)이었다. 뷰가 좋다고 해서 오르며 좌측 해변을 보는데, 산과 바다가 어우러졌다. 노을까지 붉게 물들어 있는데, 강아지풀이 하늘거린다. 이게 바로 여행의 묘미다. 우연히 만난 멋진 뷰. 나중에 찾아보니 서우봉은 삼별초군(고려시대 무인정권에 설립된 대몽항쟁군)이 마지막으로 저항했던 곳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봉수대도 있고, 일제감정기에는 일본인의 동굴이 있었다(출처: place. naver.com)고 하니 역사적으로 시달린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이렇게 야트막하고 작은 봉우리에 깃대어 전투할 때에 얼마나 막막했을까 싶다. 너무 작아서 피하고 숨기에도 녹록치 않으니 그 고생과 불안감이 얼마나 심했을지… 그럼에도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것에 대한 열망이 두려움을 앞섰었겠지.



함덕해변에서 해변을 따라서 오른쪽 봉우리를 바라보며 걷다보면 서우봉산책로와 이어지는데, 도로변 갓길에 만들어 둔 인도를 따라 올라가도 서우봉산책로와 연결된다. 인도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왼쪽에 갑자기 낭떠러지 비슷한 게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가파른 계단이다. 그 계단을 따라 내려 갔더니 뒤쪽에 서우봉 산책로가 보이고 그 앞에 캠핑카가 보인다. 가만 보니, 캠핑카 한 두대가 아니고 수십대가 여기저기에 주차되어있다. 그 너머 공터에는 텐트도 여러 채가 세워져 있고, 식수대와 샤워장까지 마련된 걸 보면, 여기가 캠핑하기 좋은 곳인가 보다.



동네에 가끔 캠핑카가 주차되어 있는 걸 볼때가 있다. 주차장에도 가끔 캠핑카가 세워져 있고, 다른 동에는 늘 캠핑카가 주차되어 있는데, 캠핑가를 지나칠 때마다 약간의 유혹이 생긴다. ‘나도 저런 캠핑카 한 대 있으면....?’ 그런데 나는 캠핑을 즐기기는커녕 시작하지도 않은 사람이니 언감생심 지나치면서도, 캠핑카 소유를 떠나, 여행을 자주, 가벼운 마음으로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이들에 대한 동경심같은 마음이 살짝 고개를 쳐든다. 여행, 여행이 상징하는 자유로움이 좋지만, 또 한 편으로는 여행이 수반하는 잗다란 귀찮은 일들이 생각나며 그만 마음을 접고만다. 그 한대의 캠핑카가 불러 일으키는 여러가지 마음이 있다. 평소와 다름없는 일과를 보내고, 어쩌면 새로운 것이 필요한 날, 주차장에 세워진 캠핑카는 엄청난 크기로 마음을 흔들기도 하고, 재미난 일상을 보내다가 같은 차를 보면, 그 차는 그 차일뿐, 별다른 감상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런데, 지금 이순간, 수십대의 캠핑카와 텐트촌, 그리고 식수대를 지나면서 마음이 어수선하다. 여행지에서 보는 캠핑카는 아파트주차장에서의 캠핑카와 다르다. 주차장에서의 낯선 캠핑카는 새로운 기분을 불러일으켰다면, 여행지에서 자기 역할을 하고 있는 캠핑카는 그저 성실한 직장인처럼 느껴졌다. 내가 오랫동안 성실한(아닐수도 있지만) 직장인으로 살아온 것처럼 말이다.


캠핑카들이 줄지어 주차된 바로 그곳이 서우봉의 산책로 시작인데 멋진 경관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이러니 캠핑족들이 여기에 자리를 잡았구나.’ 이 경치를 밤새 누리며 아침을 맞이하는 기분은 또 어떨까 잠시 상상했다. 사진을 자꾸 찍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경치다. 어둠 속에 노을이 조금 남아있고, 이렇게 고요한 경치를 누리며 찍을 수 있다니 여기가 제주는 제주구나 싶다.



앞서가는 남편과 아이들을 불러세워서 사진을 찍어주고, 경치를 찍느라 나는 가족들 보다 몇발자국은 뒤쳐져서 올라갔다. 얼마쯤 올랐을까? 봉우리의 한 귀퉁이만 보았을 뿐인데, 아이들은 벌써 덥고 피곤하단다. 사실, 아이들에게 이 경치는 내게 다가오는 것과는 달랐을 거다. 그냥 작은 산처럼 느껴진다면, 이 저녁에 땀을 찔찔 흘리면서 서우봉 전체를 돌자하면 무리일거다. 그러니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숙소로… 숙소 근처에 보아 둔 하나로마트가 있다. 마트에서 저녁에 먹을 간식거리와 내일 아침 요기거리를 사가지고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손등에 간질간질한 것이 있다. 옆을 보니 작은 아이가 얼굴 가득 웃음을 담고 버들강아지를 내 손에 비벼대고 있다. 아이코, 여행의 맛은 바로 이런 것이지! 삶의 맛도 바로 이런 것이지! 예측할 수 없는 조그마한 기쁨이 손등에 내려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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