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와 함께하는)미완(未完)의 완벽(完璧)을 꿈꾸며
코로나가 생활을 바꿨다. 사실 코로나가 이렇게 내 삶 깊숙이 끼어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처음 코로나 확진자가 한두 명 나오기 시작할 때에는 머지않아 그칠 전염병이라고 생각했다. 중국 우한의 일은 나랑 상관없는 동네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오랫동안 등교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질 것을 어디 예측이나 했겠는가? 코로나 때문에 집에서 있는 시간이 길어진 아이가 눈을 혹사하여 시력이 확 떨어지고 결국 안경을 쓰게 될 줄을 꿈엔들 알았겠는가?
평소라면, 아이 눈이 침침하다고 했을 때 바로 병원으로 데리고 갔을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 여파로 병원에 발을 들이기가 무서워 시력검사를 하지 않고 몇 달을 버티다, 겨우 안과에 데려갔더니 안경을 쓸 정도가 되어 있다. 의사 선생님은 실외활동이 시력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된다며, 아이에게 바깥활동을 많이 시키라고 권한다. 아이가 바깥 활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인데다, 학교까지 안가니 더더욱 집에만 틀어박혀 있고, 자꾸만 가까운 것만 보느라 시력이 떨어져 안경까지 쓰게 됐는데, 이거야말로 내가 직접적으로 코로나 때문에 피해를 본 부분이다.
가까운 어르신은 몇 달 동안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온갖 모임에 나가기가 저어되신 어르신이 거의 집에만 계시고, 가끔 가까운 산에 가서 산책이나 하실 뿐이다. 친구 한 명은 코로나 확산 초기에는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도 싫어서 아예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지인 중에 몇몇은 오히려 바깥 활동을 즐기고 있다. 영화관을 가도 한산하고 식당을 가도 한가하니 얼마나 좋으냐고 한다! 나는 미술관을 갔다. 코로나 때문에 보고 싶은 그림을 포기하려니 기운이 빠졌다. 그림 구경도 못하나 싶어서 나갔다. 마스크를 쓰고 내가 마실 물을 따로 챙겼다. 마스크를 쓰고도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친구가 좋은 공연이 있다고 해서, 마스크를 쓰고 뮤지컬을 보러 가기도 했다. 공연장은 거의 만석이었다. 코로나는 코로나대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지만, 우리 인간은 인간대로 삶을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누군가 말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삶도 두려워한다고.... 삶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을 수야 없지만, 두려움이라는 녀석 때문에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삶과 죽음의 중간쯤 되는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다.
누군가 말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삶도 두려워한다고.... 삶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을 수야 없지만, 두려움이라는 녀석 때문에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삶과 죽음의 중간쯤 되는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다. 언제도 완벽한 적은 없었다. 바깥 활동을 하기에 완벽한 적도 없었다. 언제든 삶에 한 오라기의 두려움조차 없었던 적은 없었다. 미세먼지가 항상 죽음처럼 드리워져 있었고, 독감이 유행했고, 폐렴이 돌았고, 장염이 퍼지고, 감기가 기승을 부렸다. 완벽한 일상을 좇다가는 일상 자체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언제도 완벽한 적은 없었다. 바깥 활동을 하기에 완벽한 적도 없었다. 언제든 삶에 한 오라기의 두려움조차 없었던 적은 없었다.
코로나가 내 일상을 나쁘게만 바꿨을까? 코로나는 맑은 공기를 덤으로 가져왔다. 코로나블루라는 우울한 시대에 그 블루(blue)가 정말 파란하늘을 가지고 왔다. 코로나 때문에 외출도 못하고 경기(景氣)도 좋지 않으니 우울감이 증가하는 반면, 사람들이 활동과 소비를 자제하면서 하늘은 파랗게 되었다. 수 년 동안 보지 못한 봄철의 파란하늘을 요즘을 매일 볼 수 있다. 투명한 하늘에 뭉게뭉게 떠 있는 구름은 웅장한 예술작품을 펼친다. 무심코 창문을 열면 신선한 공기가 마구 달려든다.
알베르 카뮈는 <페스트>에서 말한다. “도시로부터 들려오는 환희의 함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리유는 이 기쁨이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있었다. (중략) 페스트 균은 결코 죽지도 않고 사라져 버리지도 않으며, (중략) 때를 기다리다가, 인간들에게 불행도 주고 교훈도 주려고 저 쥐들을 잠에서 깨워 어느 행복한 도시 안에 다 내몰고 죽게 하는 날이 언젠가 다시 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오랑(페스트의 무대가 된 도시)의 일상을 뒤흔든 페스트가 언젠가 다시 올 수 있다고 ‘리유’가 생각한 것처럼, 우리의 삶을 멈칫하게 만드는 코로나가 언제 끝날지 모르고, 주춤했다가도 다시 어떤 변형된 모습으로 우리의 삶에 개입하려들지 모른다.
“도시로부터 들려오는 환희의 함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리유는 이 기쁨이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있었다. (중략) 페스트 균은 결코 죽지도 않고 사라져 버리지도 않으며, (중략) 때를 기다리다가, 인간들에게 불행도 주고 교훈도 주려고 저 쥐들을 잠에서 깨워 어느 행복한 도시 안에 다 내몰고 죽게 하는 날이 언젠가 다시 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베르 카뮈, <페스트>
삶은 완벽하지 않다. 내 아이의 시력도 완벽하지 않아 안경의 도움을 받게 됐다. 코로나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수 있고, 코로나 이전의 일상이 돌아오리라는 보장도 없다. 완벽해야만 하는가? 완벽하지 않아도 삶이다. 우리의 삶은 미완(未完)의 완벽(完璧)이고, 코로나가 함께여도 삶은 생동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