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만든 세상이 펼쳐진 곳, 나무고아원에는 아이들이 없다.
새벽 등산모임이 있는 날이다. 7시에 하남 나무고아원에 가기로 했으니 5시 이전에는 일어나야 한다. 알람을 4시 45분으로 맞춰두었다. 오랜만의 새벽 기상이 부담스럽다. 새벽 세 시에 잠을 깼는데, 일찍 일어나려는 긴장 탓에 다시 잠이 오지 않는다. 얼핏 잠이 들었다 싶었더니 알람이 우렁차게 울린다. 아무리 알람소리를 낮춰두어도 아침에 듣는 알람 소리는 우렁차기만 하다. 알람이 아무리 울려도 ‘너는 울어라, 나는 안 들린다.’하며 쿨쿨 잠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던 학창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알람을 아무리 작게 맞추어 두어도 한 두 번도 울리기 전에 듣고 만다.
서울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우리집에서 하남까지 대중교통으로 가려면 두 시간은 족히 걸린다. 그러니 새벽 5시에 집을 나서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마침 남편이 지방에 내려갈 일이 있다. 올커니 싶어서 남편 차를 얻어 탔는데, 출발 시간이 5시였다. 하남 나무고아원에 도착한 시각은 5시 33분이다. 대중교통으로 오면 두 시간 걸릴 거리가 새벽의 자동차로는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남편은 어두컴컴한 나무고아원에 나를 내려주고 갈 길을 가는데, 약속시간보다 무려 한시간 반이나 일찍 도착한 나는 난감했다. 나무고아원, 여긴 어디인가? 불빛도 인기척도 없는 이 어두컴컴한 세계는 도대체 어디에 속했나? 고아원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처음 약속 장소를 잡을 때에는 고아원이라는 말만 듣고 정말 고아원일 거라고 생각했다. 등산 모임 회원들은 입을 모아 후원물품을 가져가자, 후원금을 모으자, 말이 많았다. 당연히 고아원이라고 생각한 나도 봉투에 작은 후원금을 넣어 두었다. 그런데 어두운 시야에도 고아원은 보이지가 않는다. 두리번거리다가 안내 표지판을 보니, 여기는 버려진 나무를 모아서 심어 둔 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에는 고아원이라는 명칭 자체를 별로 들어본 일이 없다. 고아원은 이제 보육원이라는 명칭으로 쓰인다. 진지하게 고아원이라고만 생각한 나와 회원들의 모습이 떠올라서 피식 웃음이 난다.
그나저나 이 어두운 곳에서 무려 한시간 반 동안 무엇을 하고 기다리나? 새벽 동트기 전의 시각은 생각보다 추웠다. 얇은 재킷을 걸치고 갔지만, 가을 재킷이 그 추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처음 온 장소, 게다가 길치인 나, 어디로 가야 마음 편하게 자리를 잡고 기다릴까? 안내소도 당연히 폐쇄된 상태다. 무식은 언제나 용감한 법, 길을 모르니 무조건 앞으로 직진이다. 가장 밝은 길을 따라서 쭉 걷다 보니 한강지킴처소에 불이 환하다. 처소 너머에 흰 옷을 입은 사람이 조깅을 하는 모습이 아스라이 보인다. ‘바로 저기로구나.’ 그쪽으로 가니 강변에 산책로가 보이고, 뒤로 공사장이 시야를 가로막고 딱 버티고 있다. 오른쪽으로 가면 하남으로 깊이 들어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가면 서울 1.5킬로미터라는 이정표가 있다. 서울 사람이 서울을 벗어난 곳에서 서울이라는 이정표를 보니 왠지 반갑다. 서울쪽으로 방향을 틀고 걸어 올라갔다. 점점 동이 터오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한 둘 보이기 시작한다. 달리는 사람들도 점차 많이 보이는데, 길 잃은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며 느리게 걷는 것이 어색해서 나도 부러 힘차게 걸었다. 걷다 보니 보이는 경치가 너무나 아름답다. 숨겨진 보물이 드러나듯 햇살이 비추면서 하남 강변의 아름답고 우아한 자태가 그 몸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빛의 각도가 변하는 시각, 시시각각 강변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멋진지 입이 떡 벌어졌다. 아지랑이가 바닥에 깔려있고, 노랗게 떠오르는 빛이 온통 세상을 눈부시게 바꾸었다. 새벽 별, 샛별도 보고 풀잎에 맺힌 새벽이슬도 보았다. 조금 더 걸어 올라가니 생태공원이 나온다. 조금만 벌참새가 떼 지어 푸드득 날고 늙은 미루나무가 멋스럽다. 이런 길이라니,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겨우 30분을 왔을 뿐인데 한 대륙은 넘어온 것 같은 이색적인 광경이다. 사진을 찍어 대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경치에 몰입하여 세상 행복한 시간을 누렸다.
길을 돌려서 다시 하남 나무고아원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오늘 만나기로 한 등산 회원들이 도착했다. 일찍 도착했다고 단톡(카카오톡 그룹 대화방)에 남겨 두었더니 모두들 약속시간 보다 훨씬 일찍 부랴부랴 나와 주었다. 나무고아원 입구로 가는데, 역시 길치인 나는 가까운 길 두고 먼 길 가기 신공을 발휘해서 가장 늦게 나무고아원 주차장에 당도하였다. 그 아름다움을 두고 어찌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으랴?
다시 산책의 시작, 해가 점점 눈부셔 오는 빛이 찬란한 길을 셋이서 한 시간동안 걸었다. 아침을 먹을 식당이 문을 열때까지. 딱 배고픈 시간에 아침식사를 하는 식당이 오픈을 하고, 아침을 딱 다 먹은 시간에 카페가 문을 열었다. 오늘은 모든 것이 오픈런이다. 새벽의 선물 같은 경치도 오픈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