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더니, 갑자기 아흔 살이 된다면?
아흔 살이다. 눈을 떠보니 프란츠 카프카, <변신>의 그레고르처럼 벌레가 된 것은 아니지만, 갑작스러운 아흔 살이다. 내가 늙었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아흔 살이 되어버렸다. 동갑내기 남편도 아흔 살이다. 그는 30대부터 흰 머리가 났고, 몸도 나이든 티가 났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40대에도 흰 머리칼이 없었고, 오히려 달리기를 시작했다. 내 40대는 다른 이의 20대와 같았다. 40대에 시작한 달리기와 본격적인 글쓰기, 40대에 읽은 토지와 40대의 학위까지. 아, 여느 20대와 같은 연애는 없었구나. 40대의 어느 따뜻한 날, 첫째 아이를 데리고 커피숍에 다니면서 군중 속에서 혼자가 되는 시간, 사람 사이에 있지만 내 시간을 보내는 법을 알려줬다. 오늘 같은 날에, 뜨거운 햇볕에 땀을 흘리는 아들을 데리고 달콤한 음료를 파는 카페에 갔다. 머리를 맞대고 시간을 공유했다.
젊을 때는 90의 나이가 막연했다. 90세까지 내가 살아있으려나? 내가 90까지 살기는 할 것인가? 80, 70, 60은?? 아흔 살은 막막하다. 그런데, 어느 날 눈을 뜨니, 그레고르처럼 벌레가 된 것은 아니지만, 90살이 되었다. 나도 90까지 살 수 있구나. 40대의 어느 날, <어느 날 눈을 뜨니 아흔 살이 되었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적이 있다. 아흔은 내 연령이 아니라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20대 때는 40대에 이질감을 느끼고 그들의 삶을 겨우 가늠했다. 평화와 여유로움은 60대의 행복이려니 했다. 내가 간신히 이해하는 노년의 모습은 70대 전후의 부모님의 모습이었다. 도대체 아흔은 어떤 나이일까?
40대의 나는 젊은이처럼 꿈을 꾸며 달렸는데, 아흔이 되니, 세상도 바뀌었다. 평균 수명이 150세 시대다. 아흔 살이 되어도 아직 반평생이 남았다. 40대의 나는 여전히, 꽃을 찾는 나비처럼 꿈을 찾아 날갯짓을 했는데, 90의 나는 꿈길에 날갯짓을 한다. 잠을 자며 꿈꾸듯, 나이 듦이 꿈길이다. 아흔이 되니 몸의 감옥에 갇혔을망정 마음의 감옥이나 정신의 감옥 따위는 없다. 왜 40대의 나는 마음과 정신의 감옥에 갇혀 있었을까? 무엇에 매여 있었을까? 건강의 옷을 입었을 때는 무엇이 감옥이었을까? 생업을 위한 직장? 집안일과 육아와 집안 대소사? 다 지나고 나니, 표현하고 사랑하고 걷고 만나고 웃고 즐기던 시간이 가장 중요했을까?
오늘 눈을 떴을 때, 아흔 살의 나를 만났다. 아흔 살의 나이가 두렵지는 않다. 나의 20대는 아흔 살과 같았고, 나의 40대는 20대와 같았다. 그리고 오늘, 아흔 살이 된 나는 40대와 같다. 오늘도 글을 발행한다. 나 같은 늙은이가 쓴 글을 보고 공감을 느끼는 20대가 있으니,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40대의 어느 날, 제대로 공부를 하고 싶었다. 막연하게 품었던 자신감과 달리, 공부가 엄청 쉽지도, 월등하지도 못했지만, 배움은 아흔 살의 내가 글을 가래떡처럼 계속 뽑아낼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다. 젊을 때는 가리고 골라서 글을 썼는데, 이제는 무의식을 따라가며 글을 쓴다. 아흔쯤 되고 보니, 스스로 검열하던 검열관이 쿨쿨 졸고 있다. 산 날 보다 죽을 날이 가까운 아흔, 두려움보다 큰 것은 진실에 대한 갈망이다. 무의식이든 의식이든 거짓만 아니라면 드러내지 못할 것도 없다. 그러니 나는 자유로운 아흔이다.
다시 40대로 돌아간다면 어떨까? 이미 겪은 40대를 또 겪고 싶은 생각은 없다. 두 번, 세 번 겪어도 다른 삶을 살 것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다. 그러니 어느 날 갑자기 마흔이 되어도 별로 좋지도 싫지도 않을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뜨니 아흔 살이 되었고, 아흔 살의 나는 지금 이대로 좋다. 마흔의 내가 스무 살과 바꾸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아흔 살의 나는 마흔의 나이로 바꾸고 싶지 않다. 오늘은 내 가족을 꼭 안아주리라. 너는 너의 존재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스물이든 아흔이든 나는 나로 존재하듯이, 너는 너의 존재로 충분하다.'라고.
하루를 자고 눈을 떴더니, 또 아흔 살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처럼 살고 있다. 아흔은 바로 지금, 내 안에 있다.
커버 사진 출처, Photo by Eugene Golovesov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