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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수단이 아닌 목적 자체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고.....

by 소미소리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았다. 이 영화는 가난하지만 인간미가 있는 한 목수의 삶의 끄트머리를 다룬다. 영화 제목에서 암시하는 것처럼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나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한 인간’을 수단이 아닌 ‘한 인간’으로 순수하게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다니엘이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다.’ 라고 외쳐야 할 만큼 그가 얼마나 소외되었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다니엘은 평범하고 성실한 목수이다. 목수로 40년을 일했고, 자신이 일한만큼 벌었으며, 부자는 아니지만 그의 삶은 평온했고, 기회가 닿는 대로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인물이다. 선량하기만 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그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많은 돈을 쌓아 둔다거나 고액 보험을 들어두지 않았고, 남을 속이지 않고 땀 흘려 목재를 잘라 가구와 장식품을 만들어 팔았을 것이다. 많은 이윤을 내느라 혈안이 되어 살지 않았을 것이고, 때로는 자신이 만든 가구 따위를 가난한 이들에게 선뜻 선물했을 그런 인물이다.




그런 그가 심장병이 악화되면서, 더 이상 목수로서 일하지 못하고 쉬게 된다. 사랑하던 아내는 이미 죽었고, 아내와의 사이에 자녀도 없었다. 저축해 둔 돈도 많지 않았던 다니엘은 질병수당을 신청하기 위해 관공서라는 곳에 방문하게 된다. 그의 눈에 들어온 관공서의 모습은 이해할 수 없는 차가운 곳이다. 공무원들이 지키는 매뉴얼은 그의 눈에는 무자비하고 비합리적이다. 설명을 요구하면 반복적인 대답만 돌아오고, 말을 더 하면 소란을 피우지 말라며 경찰을 부른다. 다니엘이 살던 곳은 우리나라가 아니기에 우리나라 현실과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나라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지향하며 지방자치제도를 시행하고 있기에, 시민이 단체장을 뽑고, 비교적 시민의 의사가 지역사회 내에 잘 반영되는 편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통해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관공서를 돌아보게 되었다. 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입장이 아니라 복지 혜택을 받고자 관공서, 동주민센터 등에 방문한 사람들의 느낌은 어떨까? 의도하지 않게 가난하고 낮은 자리에 처하게 되어 불편한 마음으로 관공서에 방문하여, 낯선 공무원에게 자신의 기구한 처지를 설명하고 입증해야만 수당을 탈 수 있다면, 누구라도 예민해지고 쉽게 우울한 마음을 가질 수 있고,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공격성을 나타내지 않을까?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펜슬 세대예요. 그래서 인터넷은 할 줄 몰라요. 인터넷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고칠 수 있지요.” 라고 말한 그가,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여러 사람에게 도움을 처해야 하는 구차한 상황을 겪으며 신청한 질병수당은 기각되고 만다. 그의 주치의는 그가 쉬어야 한다고 했고, 충분히 쉬고 치유가 된 뒤에 일하라고 하지만, 관공서 소속 의사는 그가 당장이라도 일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는 직감적으로 자신의 주치의의 소견이 옳다고 생각하여 따르지만, 그것과는 무관하게 질병수당을 받을 수 없었고, 기각된 질병수당에 항고 한다. 항고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도 많이 걸려서, 항고 절차 진행 중에 다시 구직수당을 신청한다. 구직수당은 말 그대로 구직 활동을 하는 자에게 주는 수당이다. 구직 수당을 받기위해 그는 원하지도 않는 구직활동을 해야 한다. 원하지 않는 강의를 들으러 다니고, 나름대로 이력서도 쓰고, 부지런히 자신의 이력서를 돌리고 다닌다. 동네 구석구석 빠지지 않고 이력서를 돌린 결과 한 곳에서는 그를 채용하려 하지만, 그가 진심으로 일자리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건강상의 문제로 거절할 수밖에 없었고 고용주로부터 또 한 번의 수모를 당해야한다. 구직수당 수령을 위해 진심이 아님에도 이력서를 넣고 다닌 그를 위해, 한 영세업체 사장은 마음과 시간을 들여서, 그를 채용할지 고민했었던 것이다. 그는 불합리한 제도의 쳇바퀴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남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러 번의 관공서 방문과 거절, 인간적인 고뇌 등으로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진 상태에는 그는 질병수당 기각에 대한 항고를 위해 다시 방문한 관공서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는다.


이것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그리고 내용이나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다. 그가 처음 질병수당을 신청하러 관공서를 방문했을 때, 그는 관공서의 고압적인 분위기에 문화적인 충격을 느낀다. 그 곳에 다른 수당을 받기 위해 온 케이티라는 여인은 자신의 두 아이를 데리고 와서 수당을 받기는커녕, 관공서에서 소란을 피운다는 이유로 쫓겨난다. 케이티의 모습을 가련하게 생각한 다니엘은 물심양면으로 케이티를 옹호하고 돕는다. 케이티는 우리나라의 법정 한부모 가정, 또는 생계급여 수급자 정도 되는 경제적 상태이다. 시설 수급자로 있다가, 아이들의 정서상 문제 때문에 조용하고 넓은 공간을 찾아 독립하지만 이번에는, 더욱 어려운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한다. 케이티는 먹을 것이 부족해서, 아이들만 먹이고 자신은 거의 굶다시피 한다. 먹을 것조차 없어서 굶어야 하고, 비굴한 마음을 숨기고 급식소에 가서 음식물을 배당받아 와야 했던 케이티는 어느 순간 절도를 범하기도 하고, 매춘에 뛰어들기도 한다. 어떤 일이라도 해보려 하지만 극심한 취업난 속에 직장도 없고, 그녀를 도와줄 만한 가족도 없을 때, 그녀가 범한 범죄를 개인의 잘못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거의 현대판 ‘장발장’과 같은 일이 현실에서, 심지어 선진국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복지 혜택이 필요한 사람들, 당장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는 영화이다.


커버 사진 출처, Photo by Ekaterina Shevchenk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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