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변이 주는 안도감
40대 중반의 나이에 시력교정술이 받고 싶었다. 여름에 해수욕을 갔다가 안경을 절묘하게 떨어뜨린 바람에 양쪽 알에 금이 갔고, 안과에서 시력 검사를 했더니 시력이 떨어졌단다. 알을 새로 맞추었는데 전에 쓰던 알보다 더 압축했는데도 무거워졌다. 그 안경을 쓰고 있으니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 무게감이 얼마나 귀와 코를 눌러 대는지 안경은 점점 내려앉았고 안경테를 조정하느라 여기저기 만지작거렸더니 편안해지기는 커녕 점점 불편해졌다.
이 참에 시력교정술을 받으려고 폭풍 검색과 지인 정보를 모았다. 요즘 많이들 하는 스마일라식은 불안했다. 눈 안을 많이 깎아내는 것이 좋을 것 없다는 전혀 의료인 아닌 일반인의 상식적인 상식으로 눈을 가장 적게 깎아내는 수술을 알아보니 라섹수술이 있다. 라섹수술은 수술 뒤에 미친 존재감을 드러내는 고통의 시간을 며칠 동안 견딜 자신이 있다면 안정성 면에서는 우월하다는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 라섹수술 잘하는 곳을 알아봤다. 지인의 아들이 수술한 곳은 의사 한 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진다고 하니 그나마 믿음이 갔다. 여러 의사가 있는 공장형 병원보다는 한 명의 의사가 진료와 수술과 관리까지 해주는 것이 마음 편하니, 검진 예약까지 마쳤다. 얼마 전에 시어머니가 눈 수술을 하셨다. 노인이 되면 눈이 안 좋아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에는 렌즈삽입술을 많이들 한다. 눈에 칼을 대는 것에 무지막지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치료 차원에서도 렌즈삽입술을 하니, 다른 시력교정술이라고 겁먹을 필요 없다는 생각에 용기가 났다.
정말 나도 시력교정술을 받을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늙기 전에 잘 보이는 눈으로 살아보고 싶은 욕망, 안경을 빼고도 잘 보이고 싶은 욕망, 아침에 일어나면 안경부터 찾아 쓰지 않고 싶은 욕망, 누워서 뒹굴거리며 책을 볼 때 걸리적거리는 안경테를 제거할 수 있다는 욕망, 그리고 용기가 있으니 두려울 것 없었다. 아마도 내가 다니는 안과(眼科)가 시력교정술을 하는 곳이라면 두 번 고민할 것 없이 거기서 수술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처음 보는 의사에게 덜컥 눈을 가르게 하자니 불안감이 다시 엄습했다. 조금 더 알아보려고, 모든 종류의 시력교정술을 다 진행하는, 소위 말하는 공장형 병원에서 예비검진을 받아 보았다. 결과는, 40대 중반의 나는 느끼고 있지 못했지만 이미 내 눈에는 노안이 와 있었고 지금 수술을 한다면 멀리는 보이겠지만 가까운 곳은 잘 보지 못하여 돋보기를 써야 할 것이라는 소견이 나왔다. 당장이라도 수술이 가능하다는 말, 그렇지만 가까운 곳을 볼 때에는 안경을 쓰게 될 거라는 말, 지금 나는 근시이기 때문에 노안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곳을 잘 보고 있었던 거다. 잠깐 고민을 했지만, 마음은 수술을 받지 않는 것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나는 글 쓰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할뿐더러 업으로 삼고 싶은 사람이니, 근시는 오히려 고마운 존재였다. 게다가 그 공장형 병원에서 검진받을 때의 비인격적인 일률적인 철차가 너무나 불편했다. 눈을 수술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그 병원에서 진행되는 모든 절차를 불편하게 느꼈거나, 검진 과정이 너무 불편해서 그 병원에서는 수술을 할 믿음이 생기지 않았거나, 어쨌든 나는 수술을 하지 않을 이유만 찾았던 거다. 그래, 난 20대 때에도 그랬다. 젊었던 그때에는 정말 시력교정술이 받고 싶었음에도, 아직 시력교정술이 완전히 정착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술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수술이 안전하다는 것을 조금 더 확인하고 싶었던 거다. 그리고 30대의 어느 날, 다시 시력교정술을 알아보았으나, 조만간 노안이 올 수 있으니 양쪽 눈을 짝짝이 – 한쪽 눈은 아주 잘 보이고, 다른 쪽 눈은 조금 덜 보이게 만들어서 노안에도 대비하자는 소견에, 짝짝이 눈은 싫어서 수술을 안 했다. 그리고 40대가 되니 정말 노안이 와 있고, 다시 수술을 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렇게 사람의 성향은 변하지 않는 것인가? 시력교정술처럼 간단한 수술에서도 욕망과 불안이 싸울 때, 불안의 힘이 우세한 것은 변하지 않는 성향인가? 나란 사람, 욕망이 불안을 이기기 위해서는 웬만한 욕망이 아니면 아니 될 일인가 보다.
그렇게 라섹수술을 골랐다가 포기한 어떤 날, 어금니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20년 전에 치료를 받은 이인데, 몇 년 전부터 불안 불안하더니, 이번에는 임플란트를 할 때가 되었다는 소견을 들었다. 늘 다니던 치과이니 고민할 필요도 없이 임플란트 수술을 바로 받기로 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치과 보험이라도 들어 둘 것을 그랬다. 역시 미리 준비하는 성격이 아닌 나는 치과 보험을 미리 들어 두었을 리가 없다. 임플란트 수술 날짜가 되었고 다시 치과를 방문했다. 이건 정말 두려웠다. 마취 주사를 잇몸 앞뒤로 맞고 수술실로 이동했다. 평안한 성품의 의사 선생님이고 오랫동안 내 이를 보아왔으니 불안감 없이 이를 맡기기는 했지만, 초록색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오랫동안 사용했던 이의 보철물이 뽑혀 나가고 그 자리에 어떤 물질이 심기는 느낌이 생소함을 넘어 섬뜩했다. 어떤 물질이 보통못을 박듯이 심기는 것이 아니고 나사못을 박듯이 빙빙 돌려가며 심기는 느낌이 들었다. 입안에는 액체가 고이는 느낌이 들었다. ‘이거 피겠지.’ 생각할수록 심난했다.
수술은 금방 끝났다. 40대의 나이에 벌써 내 이가 아닌 임플란트를 심어 사용해야 한다는 서글픔도 잠시. 임플란트를 심고 보니 그동안 앓던 이에 가려서 통증을 느끼지 못했던 다른 이들이 불편감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다시 치과에 가니 옆 이에 충치가 아주 조금 보인다고, 그것만 치료하자고 한다. 충치 정도야 임플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바로 치료를 시작하는데, 충치를 갈아내면서 선생님이 이야기하신다. “이거, 충치가 옆까지 넓게 다 먹었네요. 조그만 충치인 줄 알았는데 넓어요.” 이것도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다. 20대 때에는 충치가 정말 잘 먹었는데, 치과에 갈 때마다 듣던 소리가 바로 그 소리이다.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나 보다. 심지어 치아에 충치가 생기는 모습마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마치 20년 전 치과에서의 모습을 데자뷔로 보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얼마간 마음이 불편한 일이 있었다. 내가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은 아닌데, 사실 좀 호구 같은 면이 있는 사람인데 가끔 마음에 불편한 일이 생기면 그 상흔이 아주 오래가는 편이다. 회복탄력성이 좀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가능하면 불편한 상황은 피하려고 하는 편인데, 사람 사는 게 어디 내 맘대로만 될 수야 있나? 살다 보면, 마음에 맞지 않는 상황도 그런 사람도 마주치기 마련이다. 지혜롭게 그런 상황이나 사람을 피하거나 뛰어넘을 수도 있지만, 그런 상황을 흘려보내고도 마음속에는 앙금처럼 남아서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일이 있다. 그 문제를 곱씹고 어떻게 더 좋은 대처 방법은 없었는지, 사소한 것에 목숨 걸듯이 오랫동안 진지하게 묵상했다. 묵상하는 나를 묵상하다가 어릴 적 일이 다시금 데자뷔처럼 떠올랐다. 어릴 때 나는 끝나지 않는 울음을 우는 아이였다. 개구쟁이였거나 말썽쟁이는 아니었는데 뭔가 마음에 맞지 않으면 끝없이 울었다. 누가 달랜다고 울음을 그치는 것도 아니었고, 어떻게 해도 그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울다 보면 내가 왜 우는지도 기억이 안 났지만 내친김에 계속 울었다. 속이 상하신 부모님이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계속 울었다. 그냥 그랬다. 그렇게 울다가 좀 쉬다가 다시 생각나면 울었다. 그렇게 긴 울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는 나의 성향 중에 하나인가 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마주침을 겪고 나서 상흔이 찜찜하게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는 것이 나의 성향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 나는 불안이 많고, 이가 잘 썩고, 울음이 긴 사람이다. 이것을 발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라는 사람의 특성이 뭐 별로 대단할 것 없는 것의 조합이어도 괜찮다. 당신이 나처럼 이런 조합으로 이 세상을 걷고 있다면 그저 격려를 해주고 응원을 해주고 싶다.
사진 출처 : Photo by Drew Dizzy Graham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