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라, 저주토끼를 읽고…
정보라의 <저주토끼>는 한국인의 정서에 잘 맞는 책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들 읽고 어렴풋이나마 위로를 받는 책이다. 독서모임 책이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여름휴가가 낀 바람에 독서모임에 참여해서 토론을 하지는 못했지만 완독은 했다. 아이러니하다. 독서모임에서 선정된 책이 아니라면 집어 들지 않을 만한 책인데, 독서모임에 빠질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읽었고, 결국 위로를 받았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남들이 욕을 하든 칭찬을 하든 내가 기독교인인 것은 바뀌지 않는다. 교회를 엄청 헌신적으로 다닌다든가 남에게 기독교인으로서 봉사를 하고 살고 있지는 않다. 그냥 식초설탕에 절여지면 피클이 되듯이, 오랫동안 교회에 출석하고 성경을 꾸준히 읽고 때로 설교를 찾아 들으면서 기독교인이 되었다. 어쩌다 보니 교회를 빠질 일이 연달아 생겼고, 주일마다 듣는 설교를 빠진 것이 아쉬워서, <분당우리교회>의 설교를 찾아들었다. 이찬수 목사님의 설교가 왜 좋을까? 그 절절한 진솔함이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틀림없다. 고생도 지질함도 감추지 않고 냉정한 듯 하지만 깊숙이 따뜻함이 배어 있는 설교이기 때문에 좋을 것이다. 아마도 그 목사님이 겪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한 것이겠지… 최근에 들은 설교에서 그 목사님은 하나님은 결코 성도들이 고생을 겪으라고 뭔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행복하라고 뭔가를 요구하신다고 했다. 그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시든, ‘너 좀 쓴맛 좀 보고, 고생 좀 실컷 해라.’가 아니라 ‘이게 널 행복하게 할 테니 좀 해 보아라.’하고 말씀하시는 거다. 하나님이 무엇이 모자라고 부족하기에 성도들에게 십일조를 요구하고 봉사를 요구할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것 없어서 하나님이 아쉬우신 것이 아니다. 십일조든 봉사든 성도가 행복을 느끼고 진심으로 감사함으로 섬길 수 있을 때 하는 것이지, 저주가 두려워서라거나 하나님에 대한 의무감으로 아까운 마음으로 할 일이 아니다.
내게는 독서도 그렇다. 아마도 애독자들은 다 그렇지 않을까? 뭔가를 이루기 위해, 지식을 쌓기 위해, 언젠가는 써먹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그냥 책을 읽는 행위 자체에서 기쁨을 느끼고, 책을 읽은 뒤에 마음에 어렴풋이 울려오는 위로의 감정이 좋기 때문에 읽는 것이다. (서두가 길었다. 저주토끼를 제목으로 달아 두고 사족을 천만 개는 달아 두어 버렸다.) 저주토끼는 또 이렇게 우연히 내 손에 놓였고 필연적으로 내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내 삶이 극단적으로 괴롭던 지난 한 달여의 기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극단적인 내용의 책이 내 마음에 살포시 놓이며 위로의 반창고를 붙여 주었나 보다. (그놈의) 디톡스를 하면서 죽을 뻔했다. 탈스테로이드를 동반한 디톡스 기간에 삶의 질이 말도 못하게 떨어졌고 거울도 보기 싫고 삶이 지친다는 느낌을 드물게 받았다. 그때에 언제나 ‘아군’인 독서는 저주토끼를 만나게 했다. 저주토끼는 삶의 극단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어느 정도로 극단적이냐면 삶과 죽음이 만나는 경계에 사는 사람들이다. 귀신을 보거나 귀신과 살거나 죽거나 죽이거나 뭐 그런 식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귀신에게 기대에 살고, 죽음에 희망을 걸어야 하는 모습은 애처로우면서도 묘하게 마음을 위로한다.
나만 뾰족한 꼭대기에 균형을 잃을 듯이 위태로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이런 극단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나면 다시금 잔잔한 물처럼 평화가 흘러들 것이라는 반어적 기대감마저 조금이나마 품게 한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위로받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말이 인상적이다.
* 표지 사진: Unsplash의Eyasu Ets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