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를 읽고...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를까? 매일 한 장씩 뜯어 내던 얇고 파스락거리던 일력, 그리고 그 일력 뒷면에 그리곤 했던 그림과 찰흙으로 만든 소꿉 장난감, 숨이 막힐 만큼 뛰어놀다가 만난 커다란 해바라기 꽃, 길가 구석진 곳에 숨어있던 솜털 같은 이끼와 왕송충이, 이런 것들이 떠오른다. 밖에서 동네 언니 오빠들 틈에서 놀고 있으면 저녁을 먹으라고 부르던 엄마의 모습과, 엄마가 만들고 계시던 저녁반찬으로 나온 알감자 조림도 생각난다.
아일랜드 작가인 클레어 키건은 담담한 목소리로 어린 여자아이의 시간을 좇는다. <말 없는 소녀>로 개봉한 영화를 먼저 보았다. 어찌나 조용하고 밝고 깨끗한 느낌의 영화인지, 스토리가 간결하고 밋밋한데도 보는 맛에 손색이 없다. 아이의 어린 시절의 추억은 자신의 집이 아니라 먼 친척 집에 버려지듯 맡겨진 날에 시작된다. 아이의 집은 산만하고 어둡다. 많은 자식들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엄마, 그리고 자신의 삶조차 어쩌지 못하고 밖으로 나도는 아빠. 그곳에서 아이는 방황한다. 그 아이를 가정에서 감당하지 못하자, 먹고살기 바쁘고 팍팍한 부모는 아이를 먼 친척집에 맡겨 버리고 마는데, 그곳이 아이에게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장소가 된다. 특별히 친절하지는 않지만 아이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지 아는 친척인 킨셀라 부부는 아이에게 작은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크게 무엇을 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는 조용하고 단정한 킨셀라 부부의 집에서 글과 수를 배우고, 삶의 잗다란 지식들을 배운다. 자기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지침을 얻는다.
처음으로 잡아 본 킨셀라 아저씨의 손. 그리고 아이는 친아빠가 한 번도 자기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알아챈다. 귀지를 파주고 머리를 손질해 주는 킨셀라 아주머니의 손. 늘 바쁘게 시달리는 어머니의 손과는 다른 느낌을 받는다. 지인의 장례식장을 오가며 받는 킨셀라 부부의 따뜻한 보살핌과 배려. 이런 것들이 아이를 부쩍 성장하게 한다. 그곳에서 화창한 여름을 보낸 아이는 다시 본가로 돌아간다. 여전히 부모의 집은 어둡고 시끄럽고 정돈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는 이제 달라져 있을 것이다. 같은 장소에 같은 사람들과 함께 하더라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닌지를 배우고,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아닌지를 배운 아이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을 거다. 아이를 데려다주고 떠나는 킨셀라 아저씨에게 힘껏 달려가 안긴 아이는 “아빠”라고 조그맣게 부른다.
아이를 낳고 키운 사람은 친아버지이지만, 이 아이에게 삶을 이겨 나가도록 정돈된 따스함을 제공한 사람은 킨셀라 아저씨이기에 “아빠”라는 부름이 어색하지 않다. 아이가 킨셀라 부부의 집에서 머문 시간은 한 계절뿐이라 해도, 그 몇 달의 시간은 아이를 다른 길로 인도해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는 자신이 끝없이 방황하는 부적응 아이가 아니라, 어딘가에서는 존중받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제대로 자라는 데에는 단 한 명의 사랑이면 된다고 한다. 그 사람이 엄마 또는 아빠가 되었든 아니면 먼 친척 아저씨가 되었든, 단 한 명이라도 아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면 아이가 엇나가지 않고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가지고 자랄 수 있다. 주인공 아이의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 거다. 그들은 너무나 바쁘고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할 만큼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아이에게 사랑을 줄 수 조차 없었을 거다. 아이가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어딘가 아득한 곳에서라도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딘가에서 작은 배려와 따스함이 흘러 나가고 흘러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은 화분에 흘러드는 물줄기처럼 성장의 발판이 될 수 있을 테다.
클레어 키건의 책은 간결하다. 그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도 담담하다. 조용한 것이 필요한 어떤 날, 잠잠히 읽기 시작하다 보면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하게 데워지면서 작은 소용돌이가 시작됨을 느끼게 될 만한 책이다. 어린 시절의 집과 동네, 작은 개천과 소꿉놀이, 그리고 젊었던 부모님, 또 지금 내 자녀와 이웃에 대한 생각마저 고개를 들게 만들 만한 책이다.
* 표지 사진 출처: Unsplash의 Saif71.com